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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와 아버지 2021년 6월호
 
묵은지와 아버지

 

우리 집 냉장고는 친정인 광주에서 온 전라도 묵은지로 가득하다. 빨간 고춧가루와 젓갈로 버무린 묵은지는 그 자체로 감칠맛 나는 술안주가 된다. 우리 아버지도 술안주로 김치를 좋아하셨다.

 

고등학생일 때 친구 분과 막걸리를 드시던 아버지 심부름으로 김치를 가져다 드린 기억이 난다. 마침 집에 김치가 떨어져 한 종지를 겨우 가져다 드렸더니 술기운에 그러셨겠지만, 딱 필요한 만큼 잘 가져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김치 같이 흔한 음식에도 아버지를 추억하는 나를 보고 아마도 사람들은 아버지와 사이가 아주 좋은 딸이라고 할 것 같다. 그런데 사실 나는 아버지가 어떤 음식을 좋아하셨는지도 잘 모르고 추억도 그다지 많지 않다.

 

아버지와 딸로서 그나마 가깝게 보낸 시간은 아버지의 마지막 6개월 동안이었다. 아버지는 20여 년 전에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내 서울 자취집에 머물며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나는 학원에서 마사지를 배워 아픈 아버지의 발과 등을 마사지해드렸다. 하지만 사실 나는 아픈 아버지에게 최선을 다하지는 못한 못난 딸이었다. 아버지 간호를 위해 휴가를 쓴 기억은 거의 없으니까.

 

병간호에 좀 더 헌신해야지 생각하는 사이 아버지의 병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중환자실에서 온갖 호스들을 달고 가쁜 숨을 내쉬던 아버지가 “이래 가지고 퇴원해서 집에 갈 수 있겠냐”라며 마지막까지 생에 대한 집념을 잃지 않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김치 심부름을 시키던 그때 아버지의 나이는 50대 초반, 가족들의 삶을 책임지려고 정글 같은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셨을 거다. 이제 나도 몇 년 후면 아버지가 김치에 막걸리를 드시던 그 나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송화윤

 

두 아이의 엄마이자 법제연구원으로서의 삶을 꿈꾸는 40대 워킹맘입니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위해 지나온 삶을 성찰하여 자기 성장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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