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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Theme] 운동습관
순두부 같은 탄력으로 계단 오르기 2021년 9월호
 
순두부 같은 탄력으로 계단 오르기

 

 

늘 생각했다. 다시 태어난다면 순두부가 되리라! 콩을 불리고 삶고 갈아 몇 번이나 냄비 뚜껑을 열었다 닫으며 기다리는 수고를 견뎌야 하지만 완성된 순두부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뽀얀 자태와 거리낌 없이 목구멍 속으로 밀려들어가는 보드라운 촉감, 거기다 오로지 누군가의 든든한 한 끼를 책임지기 위해 태어나고 마감하는 삶이라니 그 얼마나 명쾌한 존재인가! 무엇보다 나는 순두부의 탄력을 닮은 엉덩이를 갖고 싶었다.



하루 세 번의 고통과 쾌감



지난 2월부터 남편이 새벽부터 일어나 달리기를 시작했다. 다음 생에 돌멩이로 태어난다고 해도 아쉽지 않을 남자, ‘한없이 늘어지기’라면 누구와도 박빙의 승부를 겨룰 고달픈 직장인이 난데없이 알람에 맞춰 꼬박꼬박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남편의 새벽 출입을 수상히 여긴 내가 물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해?” 그런데 남편의 대답은 의외였다. “너무 우울해서!”


그 무렵 남편은 회사 일로 고민이 많았다. 몇 번인가는 이직이란 말을 언급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제야 남편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자책이 들었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축 처진 남편의 어깨를 몇 번이나 돌아봤던가. 손을 맞잡았으니 함께 앞만 보고 달리면 그만이라 여겼던 건 아닐까? 남편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달리는 동안에는 내 안의 돌덩이를 조금은 밀어낸 느낌이 들어. 그래서 그때만큼은 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내고 있는 기분이 드는 것 같아.”


며칠 동안은 나라는 존재가 달리기보다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의기소침했다. 하지만 일심동체라는 부부도 한 사람의 우주를 꼭 제 일처럼 다 알 수는 없었다. 결국 티끌만큼이라도 남편을 이해해보려면 나도 같이 움직여야 했다. 육아라는 현실적 제약이 있기에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결심은 내가 사는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낙찰되었다. 남편이 평지를 달리며 자기 안의 돌덩이를 밀어낸다면, 나는 계단을 오르며 내게 지워진 짐의 무게를 가늠해보리라!


초등학교 1학년 딸아이를 등교시킨 후 무작정 아파트 계단을 오르는 것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그런데 아파트는 함부로 덤빌 지상의 구조물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12층에 있는 우리집까지 올라와서야 그 높이를 감당할 수 없는 저질 체력에 대한 자각이 찾아왔다. 머리는 봉두난발, 입에서는 침뿐 아니라 금속성의 쉭쉭거리는 숨소리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손이 떨려 현관 잠금 버튼의 번호까지 몇 번 틀리고 나서야 집안으로 들어선 내 입에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다리로 올라왔는데 양팔은 왜 이렇게 후들거리는 거야! 그나저나 내 무게 하나 감당할 수 없으면서 그동안 난 무엇을 이겨내느라 아등바등하며 살아온 걸까?’ 그럴수록 알 수 없는 오기가 차올랐다. 어쩌면 지금 내 삶에 가장 필요한 건 순두부 같은 탄력일지도 몰랐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하루 3회씩 계단 오르기를 계속했다. 내 맘 같지 않은 몸뚱이를 생각하면 누가 시키지도 않은 고행을 사서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5개월 동안 매일 계단을 오를수록 선명해지는 심장 박동이 내 몸에 묘한 쾌감을 일깨우곤 했다.


계단을 오르면 심장이 튀어나올듯 요동치고 몸이 들썩일 정도로 숨이 헐떡여진다. 매일 호흡하면서도 들어오고 나가는 숨의 크기를 그렇게 명확히 느낄 기회가 없다. 그럼에도 찰나의 순간, 한 발로 내 몸을 지탱한 채 중력을 거스르기 위해 볼트를 조이듯 온몸의 근육에 집중해 힘을 주는 느낌이 좋아 운동을 멈출 수 없었다.



운동으로 덜어낸 몸과 마음의 무게



하루도 빠짐없이 계단 오르기를 반복하다 보니 나름의 노하우가 생겼다. ‘자세가 구부정하면 중심이 기울어져 몸이 휘청거린다. 잘못된 자세는 반드시 통증을 유발한다. 발뒤꿈치를 온전히 디딘 후 신체의 중심에 고루 힘을 주어 올라야 힘이 적게 든다. 어깨를 펴고 턱을 당긴 뒤 팔은 자연스럽게 흔들며 올라야 한다.’


남들이 볼 땐 별 것 아닐지 몰라도 운동습관이 생기면서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라는 존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제까지 멀쩡히 살아왔음에도 긴 숨을 토하며 살아있음을 다시 확인하게 되면서 남편의 마음까지 깊이 이해되었다. 하루 중 유일하게 누구보다 당당하고 바른 자세로 세상을 똑바로 마주 보는 시간, 중력을 거스르는 힘으로 내 어깨에 이고 진 짐들을 추스르는 시간을 지금도 나는 매일 매일 즐겁게 수행한다. 축적된 에너지를 가지고 다시 일상에 맞서는 힘, 남들이 알아보지 못한다 해도 성실히 오른 증거가 고스란히 내 몸에 남았다.


식이요법을 병행한 덕분인지 운동을 시작한지 다섯달 만에 체중이 9kg이나 줄었다. 하루의 에너지를 늘려가니 몸의 기운도 충만해 마음까지 넉넉해졌다. 늘어난 근육량만큼 남편에게 미소 짓는 횟수도 많아졌다. 조금씩 더해지는 계단의 개수처럼, 우리 사이에도 미세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드디어 아파트 20층 오르기에 성공한 날, 나는 남편에게 그동안 운동을 해왔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남편은 말없이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아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그의 미소가 참 싱그러웠다.


행복은 습관이다. 여전히 남편은 달리고, 나는 오른다. 우리는 마치 x와 y축이 된 듯 각자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계속 뻗어나가고 있다. 오롯이 홀로 버티며 삶의 좌표를 찍지만, 그것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결국 이렇게 우리 삶에 행복의 곡선으로 나타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방학을 맞은 아이가 동참하면서 계단 오르기는 이제 하루도 빼놓을 수 없는 놀이가 되었다. 어리고 해맑은 기운은 날다람쥐처럼 척척 계단을 오르게 만들어, 엄마보다 먼저 올라간 아이는 뒤를 돌아 가만히 손을 내밀어준다. 비록 현실의 나는 꿈의 언저리를 겉돌며 상승과 하강이라는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지만, 계단을 오르며 키운 힘과 넉넉해진 숨으로 한층 더 높은 곳을 향해 오른다. 그리고 언젠가 내 옆의 누군가가 지쳐 있을 때 순두부 같은 탄력으로 먼저 올라가 손 내밀어주는 존재가 되고 싶다. 

 

 

정율리

대학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한 37살의 주부입니다. 평생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은 육아와 자아실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지만 매일 계단을 오르고 백지를 채우며 더디게 나아가는 방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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