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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기억으로 마음이 아릿할 때, 마지나타 레인보우 2021년 9월호
 
이별의 기억으로 마음이 아릿할 때, 마지나타 레인보우

 

 

정재경(식물에세이스트) | 그림 김예빈

 

 

뜻이 맞는 디자인 브랜드들과 함께 ‘협동조합 몽당’을 설립해 2014년부터 2017년까지 활동했다. 놀 듯 일하는 공동체를 꿈꾸며 함께 전시회도 나가고, 마켓도 열면서 즐겁게 일했다.

 

제일 기억에 남는 활동은 2014년, 협동조합 지원사업에 응모해 지원금을 받아 참여한 전시회, 서울디자인페스티벌이다. 운도 따라주어 우린 신청했던 부스보다 널찍한 공간을 배정 받았다. 협동조합으로 참여한 첫 전시였다. 조합 내 여러 개의 브랜드가 모여 있으니 가구, 액세서리, 패브릭, 패션소품, 주방용품 등등 구색도 다양하고, 알록달록 보는 재미도 있었다. 덕분이었을까. 부스는 관람객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누군가가 몽당의 대표를 찾는다기에 가보니 낯선 얼굴의 관람객이 한 명 서있었다. 어깨선에 딱 맞는 재킷, 동그란 안경, 짧게 깎은 머리카락, 흰색이 듬성듬성 섞인 손가락 한 마디 정도 길이의 턱수염을 가진 중년 신사였다. 열서너 살 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과 동행이었다. 그는 상품에 대한 질문 대신 몽당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어떤 사람들이 모였냐, 어떤 취지로 설립했냐, 수익은 어떻게 배분하고 있냐 같은 사업 전반에 대한 질문이었다. 협동조합으로 모여 첫 전시를 하는 우리도 협동조합이 정확히 무엇인지 잘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스가 바쁘기도 하고, 심도 있는 질문이 버거워 나중에 연락드리겠다며 양해를 구하고 명함을 받았다. 명함을 꺼내는 손길에서 어쩐지 머뭇거림이 느껴졌다. 명함엔 분당에 쇼룸이 있는 가구업체 이름이 쓰여 있었다.

 

전시회가 끝나고 연락을 드렸더니 시간 약속을 하고 점심을 사주셨다. 디자인을 전공했다는 명함 속 가구업체의 대표는 10년 전 창업해 직접 1톤 트럭을 운전해 배송 다니며 회사를 키웠다고 했다. 우리 세대는 각자 살기 바빠 어떤 일을 함께 힘을 모아 할 생각을 못 했는데 협동조합을 꾸린 것이 기특하다며 가구 브랜드에겐 쇼룸을 내주셨고, 소품 브랜드의 상품은 구매를 해주셨다. 첫 식사 이후로 대표님은 가끔씩 점심을 사주시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8,000원짜리 우동이나 13,000원짜리 파스타를 사주시며 개인카드를 꺼내시는 분이었다.



식물과 나누는 슬픔

 

 

회사 사무실을 조금 더 큰 공간으로 이전하면서 이전식 초대장을 보내드렸다. 그런데 그가 축하의 뜻으로 보내준 화분이 사무실에 먼저 도착했다. 수반을 닮은 돌 화분에 <미래소년 코난>에 등장하는 ‘포비’의 머리카락을 닮은 식물이 심어져 있었다. 삐죽삐죽 뻗어 나간 초록잎 가장자리엔 분홍 라인이 있어 분홍 끈으로 묶은 포비의 머리카락이 연상되었다. 흙 위엔 자잘한 돌이 깔려 있고, 그 위에 주먹만 한 돌멩이 세 개가 새알처럼 놓여 있었다. 그는 부러 사무실에 들러 화분의 상태와 모양을 체크하고, 선물 받은 사람의 마음에 드는지 확인한 다음 번창하라는 덕담까지 남기고 나서야 돌아갔다.

 

이사하면서도 ‘포비 화분’을 애지중지 옮겨와 1층 흰 벽 앞에 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인사를 나누었다. 포비 화분의 진짜 이름은 ‘마지나타 레인보우(Dracaena marginata)’였다. 그 후 힘든 일이 생겨 그분과 연락도 못한 채 몇 개월을 흘려 보냈다. 오랜만에 연락한 지인으로부터 그분이 뇌출혈로 쓰러져 누워 계신지 한 달 가까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줄 끊어진 엘리베이터처럼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그대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겨우 50대 초반의 나이였다. 그가 이끄는 회사의 연매출이 100억을 넘긴 해, 이제는 직원들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 거 같다며 좋아하시던 표정이 눈에 선했다. 그 사람 좋은 웃음이 화분을 볼 때마다 떠올라 마음이 더 아렸다.

 

작년 여름, 5년 동안 무탈하게 잘 자라던 마지나타 레인보우가 시들시들하며 잎을 떨구기 시작했다. 평소와 똑같이 관리했는데 갑자기 왜 맥을 못 추는지 이유가 가늠되지 않았다. 겨우내 가까스로 생명을 이어가던 녀석은 봄이 되자 고개를 푹 꺾었다. 줄기가 뿌리 가까운 곳까지 완전히 물러 있었다. 마음이 저릿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은 수명이 정해져 있다더니 그 시기가 언제인지 하늘만 아는 듯 했다. 아직 잎이 남아 있는 가지 네 개를 잘라 물을 담은 병에 꽂아 주고, 모체와 흙은 종량제 봉투에 담아 정리했다. 그나마 좀 굵고 힘이 있는 줄기는 시험관처럼 긴 화병에 꽂아 주었다. 그보다 작은 줄기는 까만 유리 화병에 담았고, 설마 이렇게 작고 여린 줄기도 살아남을까 싶은 두 가지는 세면대 앞 유리컵에 담아 매일매일 눈길을 주었다.

 

모든 생명체는 관심과 사랑을 먹고 자란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마지나타가 깨알 같은 뿌리를 내밀었다. 화분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만들어 두 가지를 한꺼번에 심어주었다. 그러고는 베란다 문 앞에 두고 매일 매일 본다. 물이 아니라 흙에 담긴 녀석들은 이틀 새 고개에 힘이 들어가 빳빳해졌다. 마지나타는 볼 때마다 바람결에 잎을 흔들며, 이젠 그 분과 이별한 아픔이 조금 견딜만해졌다고 안심시켜준다. 이제야 마음이 놓인다.

 

후배가 새로운 사무실로 화분을 보내주었다. 후배의 첫눈에 든 식물 역시 풍성하게 자란 마지나타 레인보우. 이전 것보다 잎의 빨간 부분이 조금 더 넓고, 숱이 더 풍성하다. 검지로 흙에 구멍을 살살 파고는 ‘포비 마지나타’에게서 채취한 두 번째 가지를 심어 주었다. 사이좋게 자라는 첫째, 둘째 마지나타들과 함께 내 아린 기억도 점차 회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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