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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린 여행자의 휴식
길에서 싹트는 기억의 씨앗 2021년 9월호
 
길에서 싹트는 기억의 씨앗

 

 

구례 천은사

천은제 저수지 둘레길 ••• 소나무 숲길 ••• 천은사

 

 

박여진(번역가) | 사진 백홍기

 

 

“밥 퍼?”

백이 주걱을 들고 물었다. “아직.” 몇 분 뒤 백이 다시 물었다. “이제 퍼?” “아직.” “이제 푼다?” “응. 딱 지금이야!”

 

20여 분 동안 밥 풀 타이밍만 기다린 우린 압력솥 뚜껑을 열고 밥을 그릇에 담아 맛있게 식사를 했다. 전기밥솥이 아닌 직화 압력솥으로 밥을 해먹다 보니 뜸 들이는 시간을 엄수하는 편이다. 개인적으로 뜸이 잘 든 음식을 좋아한다. 밥 뿐 아니라 국이나 찜처럼 뜨거운 음식도 어느 정도 뜸을 들인 후 먹는 걸 좋아한다. 펄펄 끓는 화력이 사라진 자리에 남은 뜨거운 기운이 음식에 스며 부드럽게 이끌어내는 그 맛을 좋아한다.

 

길도 그런 곳이 있다. 뜸을 들인 뒤 만나야 좋은 길. 구례 천은사가 그렇다. 백과 나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몇 걸음 걸어가 일주문을 통과해 단도직입적으로 만나는 천은사보다는 천은제 둘레길을 돌고 아늑한 소나무 숲길을 지나 충분히 뜸을 들인 뒤 만나는 천은사를 좋아한다.

 

천은사는 신라 흥덕왕 3년에 인도의 덕운 스님이 창건한 고찰이다. 뒤쪽으로는 소나무 숲길이, 앞으로는 저수지 둘레길이 있다. 사찰 옆으로 청류계곡이 흐르고 그 물살 위로 오랜 세월을 늙어온 정자, 수홍루가 있다. 아치형 돌다리 위에 단정히 올라간 수홍루 옆에서 숲이 시작된다. 천은사 앞 천은제에는 지리산의 능선과 구례의 하늘이 가만히 담겨 있다. 그 둘레로 조용한 산책로가 나 있다.

 

우린 천은제 둘레길에서 길을 시작했다. 저수지에서 풍기는 옅은 비린내가 기분 좋게 스몄다. 물은 가만한데 걸을 때마다 풍경이 조금씩 바뀌었다. 구름이 지나가며 모양을 바꿀 때마다, 새가 날아들어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킬 때마다 저수지는 조금씩 다른 풍광을 열어 보여주었다. 이따금 섬약한 꽃의 씨앗이 바람을 타고 부유했다. 우리의 기억 속에 차곡차곡 저장되었던 구례의 숲과 길 이야기가 그 씨앗을 따라 같이 부유했다.

 

백과 나는 구례의 섬진강과 시장을, 오미마을과 운조루를, 화엄사와 구층암을, 천은사와 뚝방길을 이야기했다. 보물창고처럼 정성껏 지킨 기억은 아니어서 허술하고 끊기고 부푼 구간이 많았지만 그래도 그 낡고 허름한 기억이 우리의 삶을 푹신하게 지탱해주는 게 좋았다. 우리의 삶에 연고 없는 타지의 숲과 길이 흘러들어와 있는 게 좋았다.

 

이상하게도 어느 지역, 어느 길에 얽힌 기억은 다른 지역, 다른 길에서는 잘 소환되지 않다가 그 지역에 가야만 예전의 기억을 만나 비로소 다시 이어진다. 묵은 기억들은 마치 뜸이 잘 든 밥처럼 적당한 농도로 엉겨 붙어 찰지고 길게 이어진다. 백과 나는 반가운 친구를 만난 듯 구례의 추억들을 소환해 둘레길을 걷는 내내 이야기했다. 구석구석에서 찾은 구례의 추억을 더듬는 사이 어느새 천은제 길은 끝나고 일주문이 보였다. 그러나 아직 일주문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었다.

 

 

 

기억의 꽃씨가 된 숲길

 

 

우린 일주문 옆으로 난 숲길로 들어섰다. 그곳에 부드러운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었다. 그 숲 어디쯤에는 누워서 쉴 수 있는 굴곡진 나무 벤치도 있고, 또 어디쯤에는 차고 맑은 계곡 샘도 있었다. 숲길은 오래된 이야기를 풀어내듯 깊게 이어졌다. 소나무들 사이로 천은사가 언뜻언뜻 보였다. 모든 숲길이 그러하듯 나무와 흙과 바위와 풀들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정물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작은 돌 하나만 들춰도 그 안에는 내가 알지 못하는 세계가 먹고 먹히고, 살고 죽어가며 쉼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시들어 떨어진 나뭇잎도 죽은 곤충의 몸도 흙에 스며 숲의 생명을 계속 이어주고 있었다.

 

숲의 공기에는 마지막 한 개의 입자까지도 살뜰하게 살아낸 것들이 내쉬는 숨으로 가득했다. 이 숲의 숨은 내 기억의 혈관 어딘가를 꽃씨처럼 떠돌다가 언젠가 내가 이곳에 다시 왔을 때 소환되어 푸른 기억으로 활짝 꽃을 피울 것이다. 내 삶에 그렇게 부유하는 기억의 씨앗들이 있다는 건 무척 아늑한 기분이었다. 숲을 거의 다 빠져나올 무렵, 커다란 소나무 너머로 사찰 지붕에서 한창 기와를 수리 중인 와공들이 보였다.

 

“기와를 고치나보다.” 백이 와공들을 보며 말했다. “그러게. 수백 년을 버텼고, 앞으로도 또 버텨야 하니까.” 부드러운 바람 끝에 연하게 꽃내음이 묻어 왔다. 조금 누운 해가 따뜻하게 어깨에 내려앉았다. 우린 수백 년 된 커다란 소나무 뒤에서 와공들이 작업하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문득 이 꽃내음과 소나무, 와공들의 모습이 평생 잊히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이 사소하고 평온한 순간이 언젠가 내 삶의 언저리에서 흔하고 환한 꽃을 불쑥 피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공들을 뒤로 하고 조금 더 걸으니 비로소 천은사였다. 일주문을 코앞에 두고 두어 시간 뜸을 들여가며 저수지와 숲길을 걸어 도착한 천은사에 환한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부드럽게 무르익은 기분과 기억과 이야기들이 사찰 구석구석에 스몄다. 우린 천천히 천은사를 구석구석 걸었다. 곳곳에 스민 기억과 이야기들이 훗날 다시 만났을 때 우리 삶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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