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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에 깃든 이야기
‘포도’가 살던 작은 세상 _ 어항 2021년 9월호
 
‘포도’가 살던 작은 세상 _ 어항

 

 

이유미(에세이스트) | 그림 김희현

 

 

2020년 봄,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물고기를 키우고 싶다고 보채는 아이와 함께 동네 재래시장 앞에 있는 수족관에 간 날이었다. 여주인이 가리킨 어항 속에 가득 담긴 금붕어 중에서 아이와 나는 쉽게 구별할 수 있도록 완전히 다른 색깔로 세 마리를 샀다. 가로 25cm, 세로 18cm 정도의 작은 어항까지 고른 다음, 약간의 수초와 모래, 물고기 밥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새 식구가 된 ‘반려물고기’들은 아이의 참신한 작명 실력 덕에 레몬, 사과, 포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아이의 책상 위에 어항을 두었다가 좀 더 자주 볼 수 있는 위치가 나을 듯해 주방 식탁으로 옮겼다. 아이와 같이 어항 속을 들여다보며 레몬, 사과, 포도와 함께 오래오래 지내는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이 참으로 즐거웠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이틀 간격으로 레몬과 사과가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홀로 남겨진 포도가 안쓰러워 며칠 후 아이와 다시 수족관에 가 두 마리를 더 사서 어항에 넣어줬다. 사실 아이는 처음에만 신기해하다 금세 관심을 거두었다. 결국 물을 갈아주고 매일 아침 물고기 밥을 챙기는 건 내 몫으로 남았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아들보다 내가 더 물고기들에게 깊은 정이 생겼다. 그런데 얼마 뒤 희한하게도 나중에 사온 두 마리만 또 물에 둥둥 떠 있는 게 아닌가. 이번에도 포도는 멀쩡해 다행이었지만 궁금증이 커졌다. ‘물도 깨끗하게 유지해주고 밥도 잘 주는데 왜 자꾸 물고기가 죽는 걸까. 포도가 특별히 건강한 걸까?’ 친구를 잃어서인지 지느러미가 축 처져 보이는 포도를 바라보다 이번에는 포도만 잘 키워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로부터 1년 여가 훌쩍 지났다. 몸집이 살짝 커진 포도는 아직 건강히 잘 살고 있었다. 여과기 없는 작은 어항이라 거의 매주 물을 갈아주었다. 수돗물을 하루 정도 받아뒀다가 갈아주었는데 일주일마다 반복하려니 보통 일은 아니었지만 포도를 무탈하게 키워내려면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렇게 부지런히 어항을 관리하며 맞이한 6월의 어느 날, 포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뒤집어진 채 미동조차 없었다. 깜짝 놀란 나는 이런저런 방책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포도를 꺼내 배 부분을 심폐 소생하듯 몇 차례 살살 눌렀다. 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는 방법이었다. 그저 본능에 따랐다. 배를 눌러주면 숨을 쉬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아니 ‘숨 쉬어, 포도야!’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며 작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바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앞서 떠난 물고기들과 달리 어떻게든 포도는 반드시 살려내고 싶었다.

 

어느 정도 심폐소생을 한 후 포도를 어항 속에 넣었는데 여전히 움직이질 않았다. 나는 다시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배 부분을 부드럽게 자극했다. 그러곤 간절한 기도와 함께 어항 속에 한 번 더 넣었다. 그런데 나의 갸륵한 뜻이 하늘에 닿은 것인지 이번에는 포도가 뻐끔뻐끔 숨을 쉬었다. 언제 배를 보였냐는 듯 포도는 어항 속을 유유히 헤엄쳐 다녔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경이로운 광경이었다. ‘배 마사지가 정말 심폐소생의 역할을 한 건가? 죽은 게 아니라 더워서 잠시 기절한 거였나?’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다시 살아난 포도를 보고 매우 기뻐했다.

 

그런데 지난 8월 6일, 포도가 이번엔 진짜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말았다. 사실 이번 원고의 소재로 어항을 정했을 땐 내 손으로 포도를 살린 에피소드만 쓰려고 했는데 그 사이 포도가 내 곁을 떠났다. 포도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봤다. 꾹 다문 입술과 달리 예쁘게 반짝이는 두 눈이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듯했다. 이번에는 배 마사지 대신 포도의 동그란 눈을 한참 들여다봤다.

 

아이와 함께 옥상 화단에 묻어준 지 며칠이 흐른 지금도 내가 지나갈 때마다 물속에서 튀어나올 듯 힘차게 헤엄치던 포도의 잔영이 아른거린다. 포도가 살아가던 세상이었던 작은 어항은 아직 그 자리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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