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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 : 바람의 항구
지은이 : 이재연        
분류 : 국내 | 단행본 | 문학.예술
책정보 : 무선, 286쪽
출간일 : 2020-07-15   가격 : 15.000원
ISBN : 978-89-464-2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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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촘촘한 언어

 

난봉꾼인 아버지, 남편에 대한 증오를 자식들을 향한 광적인 사랑으로 푸는 어머니, 독단적인 오빠, 혼자만의 공간에 갇힌 폐쇄 성향의 언니…. 작가 이재연의 가족사에는 그의 고향 바다 선창가의 밤처럼 침울하고 스산한 바람이 분다.

 

똑 부러지는 성격의 저자는 이들 사이에 놓인 여러 관계의 계곡들 사이를 넘나들며 성장한다. “사방이 어둑어둑해질 무렵 바닷바람이라도 불어 대면 마음은 뒤숭숭해지고 갑자기 사는 것이 허망하고 어디라도 휙 떠나고 싶은 심정이 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목멘 선창가 유행가 소리는 한恨으로 뜨거운 가슴을 식히고 싶은 유혹이 들게 한다.”

 

어두운 선창가에서 들려오는 낯선 유행가 가락에 몸을 맡기고 자유로운 영혼으로 세상에 나선 저자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둡다. 하지만 이 어둠이 작가로서의 삶을 시작하게 된 원동력이자 소양이다. 때로는 바다 위로 처음 떠오르는 태양처럼, 때로는 소금기 머금은 바닷바람처럼 인생의 굽이굽이를 아슬아슬하게, 혹은 능수능란하게 헤쳐 나가는 작가가 촘촘하게 직조하는 언어의 바느질은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닌, 오랜 세월 쌓아 올린 인생 장인으로서의 결실이다.

 

남편을 뒷바라지하며 스위스 국경 도시 바젤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삼십 대 시절의 이야기부터 세 살배기 손자와 영혼으로 소통하며 어울리는 할머니가 된 후의 이야기까지, 저자의 인생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이 대개 그랬던 것처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희생과 감내라는 전통적인 역할 굴레에 놓여 있기도 하다. 고향 목포 선창가를 떠날 때 희망했던 ‘바람風’은 어쩌면 언젠가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귀착지의 평온함을 바라는 ‘바람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중의성이 이 책의 제목 『바람의 항구』에 숨어 있는 저자의 인생이다. 이재연은 바람으로 태어났으니 바람으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굴비를 선물했는데, 자식들 생각에 손도 대지 않고 장독 안에 고스란히 ‘모셔 둔’ 어머니를 보고 여자의 인생을 슬퍼하다가, 또 고민하다가 조용히 읊조린다. “버지니아 울프는, 시간과 에너지와 능력을 끝없이 분산시키는 ‘집안천사’를 자신의 삶 속에서 일찍이 죽여 버렸다. 결혼한 여자는 그 대책 없는 천사 때문에 자신이 바라는 삶에서 멀어진다고 생각했다. 난 앞으로 내 삶에서 ‘집안천사’의 부속품 같은 ‘굴비’를 하나하나 없애 버리겠다고 엄마의 장독대 앞에서 결심했다.” 엄마의 굴비에서 여자의 삶을 찾아내듯, 인생이라는 장독의 뚜껑을 조심스레 여는 시선에는 삶을 직조하는 작가의 언어가 들어 있다. 이 언어들은 다시 가족사로 이어져 연극을 하는 딸과, 학생들을 가르치는 남편의 이야기로 전이된다. 딸의 결혼 이후에는 사위와 손자와의 관계 속에서 또 다른 인생이라는 무대의 막을 올린다. 특히 결혼한 딸과의 ‘인연’은 자신과 어머니의 ‘인연’과 또 다른 맥락에서 애틋하다. “서툴고 조금 엉터리 멘토이지만 친구 같은 엄마와, 어리게만 보이는 제자 같은 딸. 그 둘이 함께라면 어떤 인생의 위태한 파도도 이겨 낼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인생 선배인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일어서게 해 주려는 모습을 보며 나는 비로소 딸이 왜 내 곁으로 왔는가, 하고 새삼 감사하게 느꼈다.” 이런 마음들은 “한때는 된장 고추장을 주고받는 따뜻한 관계를 원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언니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알 것 같다.”라는 관조로 이어지며 어린 시절을 어둡게 채색하던 가족사와도 화해하는 길을 모색한다. 동네 친구 S와 삼십여 년 나눈 삶을 돌아보는 인생의 한 모퉁이에, 문학 친구 K와 편지와 문자로 나눈 우정을 관찰하는 시선에, 유독 여성의 사회적 감수성이 드러나는 것은 관계와 관계 속에서 상처받으면서도 다독이고 이겨 낸 희망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병, 완치, 재발, 그리고 투병, 치료, 또 재발…. 고통스러울 정도로 긴 병마와의 싸움은 저자를 지치게 했다. 이 삶에 대해 명명命名할 자유가 있다면, 「슬픔의 연대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길고 지루한 투병의 페이지들이 이어졌다. 평화로웠다면 예술도 없었을까. 이 시기의 암울은 선창가를 자유롭게 뛰어다니던 소녀의 감수성을 소집해 한 편 한 편 잘 짜인 퀼트와도 같은 삶의 기록으로 남기도록 이끌었다. “어둠을 비추는 빛에 도취된 사람처럼 어두운 운명을 밟으며 한 걸음씩 더 높고 환한 쪽으로 나아”간 그 끝에서야 비로소 희망을 찾았다. 이 희망은 다시, 이웃에 대한 따뜻한 시선으로 이어지기도 하고, 사회 현상에 대한 엄격한 관찰로 확장되기도 한다.

 

거대한 관계의 고리 속에도 생활이 있고, 삶이 있고, 사람과의 만남이 있다. 고통을 감수한 후에 얻은 삶의 기쁨에 다시 명명의 자유를 준다면, 그것은 「희망 사전」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이 사전은 그의 말처럼, 병마와 싸운 투쟁기가 아니라 “자신을 믿어 승리”한 기록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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