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이는 식당에서 4인용 테이블에 홀로 앉은 저 여인은 완이다. 거리두기가 완화된 주말의 경리단길은 이른 오후부터 활기롭다. 햇살은 어느새 여름의 그것 같고 바람은 봄의 서늘함과 상큼함을 잔뜩 머금었다. 그는 아까부터 식당 맞은편에 있는 카페 테라스에서 주인과 함께 볕을 쬐고 있는 개 한 마리를 바라보고 있다. 개는 참 사랑스러워, 그는 생각한다. 세상의 한가함을 다 가...
[양은호 소령] 블랙이글스는 아름다운 대형과 박진감 넘치는 기동을 구사하는 에어쇼로 명성 높은 공군 특수비행팀이다. 총 여덟 대의 항공기 중 선두에 서는 리더기에겐 팀의 모든 안전을 책임지면서 대한민국 공군의 위상을 높여야 하는 막중한 사명이 부여된다. 그 어렵고도 영광스런 자리에 올해부터 새로운 파일럿이 앉았다. 강원도 원주의 제8전투비행단 기지로 가는 차 안 공기가...
첫 번째 편지 - 자기와의 약속을 지킨 제자 장애인의 날이었던 지난 4월 20일, 모처럼 만난 제자로부터 10만 원이 넘는 점심을 대접받고 감회가 새로웠다. 맹학교 때 담임이었던 아내와 다른 맹학교 교사였던 나, 그리고 학교 때 음악 선생님 등을 초대해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준 건 시각장애인으로 뉴욕 월가에서 활동하고 있는 애널리스트 신순규였다. 고맙게도 오래...
일본 가루이자와에 다녀온 뒤로 여름 하면 바다보다 숲이 먼저 떠오른다. 깊은 숲의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몸을 감쌀 때 여름의 끝에 와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내가 가루이자와에 갔던 때는 4월이었는데 도시는 한 계절을 뒤로 물린 듯했다. 해발고도 천 미터의 도시, 일본의 지붕이라 불리는 고산지대인 나가노현의 특성상 다른 지역보다 평균기온이 훌쩍 내려간 까닭이었다. 이제...
이집트에서 만 5년째 살고 있는 나는 매일 이른 아침마다 집을 나선다. 내 하루를 활기차게 열어주는 사람들은 카이로의 거리를 걷다가 만나는 동네 이웃들. 버스나 전철에서 내려 어깨를 나란히 하고 출근하는 직장인들, 주스 가게 아저씨, 에이쉬(아랍식 빵)를 파는 아저씨도 꽤 친숙한 얼굴들이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같은 거리를 지나는 사이라는 것만으로 동지애를 느끼곤...
신혼 때 직장 생활을 하며 야간 대학원을 다녔다. 퇴근 시간이 되면 상사와 동료 눈치를 보며 전공 서적과 ‘하버드 비지니스 리뷰’ 같은 읽을 자료들이 잔뜩 들어있는 무거운 가방을 어깨에 메고 사무실을 나섰다. 회사를 빠져 나오자마자 지하철역으로 내달렸다. 수업 시작은 오후 7시. 회사에서 역까지 걸어서 15분, 지하철 이동 시간 20분, 역에서 강의실이 있는 건물까지...
내가 스테이크라는 음식을 처음 접한 건 대학에 들어가 여자 친구가 생긴 뒤였다. 그 전까지 내겐 스테이크라는 음식을 먹어볼 기회가 전혀 없었다. 대학생이 되기 전에는 값비싼 서양 음식을 사먹을 만한 경제력이 없었고, 마침 우리 동네에는 그 낯선 서양식 생고기 구이를 파는 레스토랑이 한 군데도 없어 스테이크는 그때껏 내게 완벽한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대학생이...
더 디그(The Dig) 개봉 2021년 | 감독 사이몬 스톤 출연 캐리 멀리건, 랄프 파인즈, 릴리 제임스, 자니 플린 OTT의 세계에는 수많은 영화가 존재한다. 극장 개봉작들을 소개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 플랫폼마다 오리지널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해외에서는 극장 개봉을 했지만 국내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영화들도 접할 수 있게 해준다. 너무 많은 작품들이 있다...
약속을 제안한 쪽보다 받아들이는 쪽이 더 오래, 깊게 기억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수많은 경험으로 알고 있다. 말한 사람의 입에서 공기와 함께 증발된 약속들은 상대에게 보다 강렬하게 안착된다. 그 약속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동안 기뻐하고 안심하고 때론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사랑이 깊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약속이 무너졌을 땐 믿었던 깊이만큼의 절망감을 느낀다. 상대를 이해할...
소망을 땅에 묻은 적 있다. 1999년이었고 열네 살이었다. 나는 할머니 때부터 살아온 작은 바닷마을에 살고 있었다. 엄마와 이모들이 다녔던 하나뿐인 중학교를 다니며 고만고만 공부하는 애였고, 창가 자리를 제일 좋아했다. 언덕배기 학교라서 창밖엔 하늘밖에 안 보였다. 하늘이 흐려 구름이라도 구물구물 몰려올라 치면 꼭 할머니가 물질하던 바다 같아서 좋았다. 습한 바람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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