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지면 우리 집 거실엔 언제나 차를 끓이는 티팟이 워머(wammer)에 올려져 있었다. 워머와 티팟은 겨울이 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우리 집만의 신호였다. 매년 이맘때쯤 엄마는 가족들이 밖에 나갔다 오거나 방안에 있다 거실에 나오면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도록 차를 끓여 놓으셨다. 나도 엄마처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계절나기 준비를 한다. 집안에 공기가 차갑게 ...
TV프로그램 강철부대를 통해 각인된 그의 이미지는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무장한 터미네이터 같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물감 냄새가 가득 밴 작업실엔 험한 자연을 거침없이 누비던 남자는 온데간데없고 광활한 상념의 바다에 표류한 고독한 미술가만 남아 있었다.미술가 육준서(26)의 작업실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작업실과 그의 마음속 풍경이 서로 닮았다는 인상이 짙어졌다. 공고히 세워졌으나 많이...
단독주택에서는 계절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가을은 마당 가득한 낙엽으로 실감한다. 수북이 쌓인 낙엽 위를 걸어보는 즐거움도 잠시, 떨어지는 낙엽을 치우느라 몸과 마음이 바빠진다. 11월은 낙엽의 계절이다. 낙엽에 관해 얘기하려면 이효석의 낙엽을 태우면서를 정독하고 시작해야 한다. 나는 이 작품을 고등학교 때 배웠다. 워낙 명문인 데다 대입시험에 자주 출제된 탓에 지금도 대부분의 문장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글에는 낙엽을 태우는 냄새가 잘 볶은 커피 향과 같다는 표현이 나온다. 이 구절이 몹시 궁금했다. 마당의 낙엽치우기는 대부분 부모님이 해결했고 원두커피는 그 당시 워낙 귀해 내가 마실 기회는 아예 없었다. 가난했...
작고 소박한 집에 우주처럼 넓고 깊은 삶의 지혜가 담긴다. 그 생각이 높고도 향기롭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퇴계 이황의 도산서당을 오마주해 지은 집이 그런 공간이 되길 소망한다.건축실무를 시작한 지 30년이 훌쩍 넘었다. 4년 동안 공부하고 대학교를 졸업했지만 정작 건축에 대해 아는 것도 많지 않고 무언가 속이 휑하다는 공복감에 모자라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녔다....
땅은 척박했다. 흙보다 돌이 많은 땅, 가시덩굴이 뒤엉킨 땅. 농부는 돌을 캐내고 덤불을 뽑았다. 평상처럼 크고 넓적한 바위들은 돌챙이(석공)를 불러 캐고 쪼갰다. 바다에서 불어온 샛바람은 소금기 많은 모래를 자꾸 실어 날랐다. 귀한 흙에 모래가 섞였다. 농부는 캐낸 돌을 밭 테두리에 가지런히 쌓아 모래를 막았다. 여전히 땅은 푸석하고 거칠었다. 화산이 폭발하며 만든 화산...
꽉 막힌 출퇴근길 도로 위, 사람들의 시간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 국가교통조사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직장인들의 하루 출퇴근 소요 시간은 평균 약 1시간 20분. 서울만 보면 출근 41.8분, 퇴근 54.6분으로 길에서만 1시간 36분을 낭비하는 셈이다. 이 시간을 아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에 버리는 시간과 개인 삶의 질에는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집무실(執務室)...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 일에 너무 참견이 많아 큰일이야.” 지하철 안에 난데없이 시국과 풍속을 탓하는 목소리가 우렁우렁했다. 쓸데없이 남 일에 관심이 많다며 우리 민족성을 매섭게 비판하던 노인은 이윽고 캐리어에 반려견을 싣고 이동하던 옆자리 젊은 커플에게도 개를 왜 데리고 나왔느냐고 힐난조로 물었다. “개한테 그게 얼마나 큰 ‘개고생’인지를 알아야지!” 잠시 후 노인의 타깃...
에디터 한재원
내게는 다우(茶友)가 여럿 있다. 다우는 ‘차 친구’라는 말인데, 차를 좋아해서 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차를 마실 수 있는 벗을 뜻한다. 차 친구들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티 큐레이터라는 직업상 혼자 차를 다루는 일을 하다 보니 때로는 차가 곧 일이 되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다우를 찾는데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쉼과 여유를 얻는다. ...
아무 생각 없이 한 곳만 바라보는 ‘멍 때리기’는 머릿속을 맑게 해준다. 쉬워 보이지만 바쁜 일상에서 한 곳에만 집중할 틈은 의외로 잘 생기지 않는다. 이럴 때 무념무상의 세계로 인도해줄 물건이 필요하다. 에디터 한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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