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항이 백어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버지께 특별한 가르침을 들은 것이 있습니까?”백어가 대답했다. “예전에 아버지가 뜰에 홀로 서 있을 때, 제가 종종걸음으로 지나가자 ‘너는 시를 배웠느냐?’ 물으셨습니다. ‘아직 못했습니다’라고 대답하자, ‘시를 배우지 않으면 남들과 말을 할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물러나 시를 공부했습니다. ‘다른 날 또 홀로 서 계실 때...
얼마 전에 팔순 노모가 오래 함께한 소 형 라디오가 더 이상 작동 않는다고 하시기에 라디오를 하나 구입했다. 우선 유명 전자회사의 대리점을 들러보았지만 라디오는 없었다. 국내 가전회사들이 라디오를 생산하지 않은 지 오래됐다며 인터넷에서 찾아보라는 얘기만 들었다. 노모는 침대 머리맡 탁자에 라디오를 놓고 주로 누워 있는 시간에 사용해왔는데 그와 유사한 크기와 모양의 모델을 ...
그림·김희현 얼마 전에 초록색 지퍼가 달린 귀여운 보라색 필통을 구입했다. 직장인 시절에는 그날 들고 나갈 가방이 작으면 가장 먼저 빼는 물건이 필통이었다. 볼펜은 가방 속 책장 사이에 껴두어도 문제없던 물건이었다. 책방을 열고 자전거가 이동수단이 된 다음부터는 늘 필통을 소지한다. 노트북을 넣을 수 있으면서 두 손이 자유로워야 해서 주로 공간이 넉넉한 백팩을 메기 때문에...
다사다난했던 2020년 한 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지는 해에 실어 잊고 싶은 기억을 모두 떠나보낸 자리에 새로운 희망이 자리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생이별의 주범 ‘코로나19’ ‘미오’를 만나기 전까진 밤늦게까지 이어지는 노동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요즘엔 길을 가다가 ‘야간진료, 24시 영업, 연중무휴’ 같은 단어들만 봐도 속이 상한다. ...
[래퍼 치타] 사랑도 그러한 것처럼 음악도 타이밍이다. 시도해보고 싶은 음악이 생겼을 때 주저 없이 행동으로 옮기는 래퍼 치타를 보며 내린 정의다. ‘이래선 안 돼 what? 저래선 안 돼 why? 너 님은 뭔데 나에게 이래라저래라 주눅은 안 들어.’ 최신 디지털 싱글곡 개Sorry의 가사로도 짐작되듯 래퍼 치타(30)는 자신의 행보에 걸린 뜻밖의 제동에 좀처럼 주춤하지 않는 뮤지션이다. 이번 ...
그림· 동그란씨 이사를 준비하면서 새집에 있는 화재경보기와 일산화탄소감지기, 소화기를 새 모델로 바꾸는 일을 올해 만 15살인 아들 데이비드에게 맡겼다. 2년 전 크리스마스 선물로 준 도구박스와 전기드릴을 들고 다니며 원래 아빠가 해야 하는 일들을 불평 한마디 없이 해치우는 아들이 너무 대견해 보였다. 언제 이렇게 훌쩍 컸는지 흐뭇하게 지켜보다 옛날 생각이 났다. 아내는 자...
ⓒ 손묵광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마을보다 탑이 먼저 있었는지도 모른다덜 자란 두 그루 소나무를 굽어보는의젓한 탑신의 무게하늘이 낮게 드리웠다추사의 세한도보다 석탑은 더 오래풍장의 겨울을 온몸으로 견뎌왔다어느새눈발 그쳤지만새들은 가고 없다 카메라 렌즈는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그대로 찍어냈다. 추사 김정희가 1년 중 가장 추운 날을 그렸다는 세한도에는 추운 겨울 황량한...
그림·지은아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4년 11월, 요즘으로 말하면 수능시험에 해당되는 학력고사를 치렀다. 얼마 뒤에 성적표를 받았는데 생각보다 점수가 낮게 나와 수도권에 있는 법대 진학이 힘들게 되었다. 집안 형편상 장학금이 아니면 학비를 마련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상황에서 안타깝게도 내 성적은 장학금을 받을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주변 어른들은 ...
그림·권혁일 가을이 깊어간다. 서늘한 날씨에 거리를 헤매다 귀가하면 샤워기 꼭지에서 떨어지는 따뜻한 물줄기가 그리워진다. 물줄기가 몸에 닿자마자 생각할 틈도 없이 ‘아, 좋다!’라는 감탄사가 새어 나오는 그 포근함. 지금은 언제든 수도꼭지만 돌리면 누릴 수 있는 행복이지만 군대에서는 결코 당연하지 않은 호사였다. 내가 근무하던 부대는 전방이었기 때문에 10월만 돼도 아침저...
얼굴을 스치는 바람이 제법 매워졌다. 가을이 깊어갈수록 진한 그리움이 안으로 파고든다. 마음은 아직 청춘인데, 계절에 대한 느낌이 해마다 달라지고 외로움마저 친구처럼 익숙해진다. 고향 들길을 걷노라니 생뚱맞게 가을 속에 슬그머니 눕고 싶은 충동이 인다. 산과 들녘에 펼쳐진 가을이 하얗다. 억새꽃 물결이 흥겨운 춤을 춘다. 손 흔들며 반갑다고 소리를 낸다. 꽃의 빛깔과 속삭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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