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부화해 장성한 백봉오골계들로 닭장 안이 북적인다. 며칠 전부터 서리가 내리더니 급기야 지리산 천왕봉에는 눈이 내렸다. 오후 5시만 되어도 저녁 해가 달리기하듯 서쪽으로 넘어간다. 어두워지기 전 황토방에 군불을 지핀다. 초등학교 교가 첫 소절에 나오는 영재봉은 우리 동네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다. 개인적으로 이 맘때의 영재봉을 가장 좋아한다. 생명을 다한 나뭇잎들이 마지...
그림·김보통 작년에 영월에 갔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쳐 전교생이 23명인 곳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서였다. 학교는 고개를 치켜들어야 정상이 보이는 산과 산 사이 골짜기에 있었고, 골짜기 밑으론 작은 천이 흘렀다. 천을 중심으로 이삼십 호 정도의 민가가 있고, 도로를 따라 몇 개의 상점이 쪼르륵 늘어서 있을 뿐, 길가를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한 편엔 메밀밭이 넓게...
2년 전 한 동영상 사이트에 올라온 영상 속 여인은 춤추는 한 마리 나비 같았다. 벚꽃 잎이 흩날리는 강변도로를 미끄러지듯 달리는 롱보드 위에서 사뿐사뿐 발을 내딛는 모습은 여태껏 보지 못한 우아한 보딩이었다. 영상은 순식간에 4만 여회의 조회 수를 기록하며 빠르게 퍼져나갔다. “초등학교 방과 후 미술교사로 일할 때라 보드는 취미였어요. 여의도에 놀러 갔다가 재미 삼아 찍은...
그림·지은아 언젠가 ‘살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의 흔적으로 하나의 지도를 만들어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란 말을 들었다. 가족처럼 짙게 흔적이 남는 인연부터 찰나의 스침에 불과한 우연까지 모든 만남이 어우러져서 아름다운 삶의 지도가 완성된다고 말이다. 인연의 소중함이 마음 깊이 다가올 때마다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지금껏 그려진 나의 지도에서 잊고 있던 흔적은 무엇일까. 생...
어릴 적 우리 마을엔 유명한 자린고비가 살았다. 부지런한 일꾼이었던 그는 남보다 일찍 논밭에 나가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일을 하다 새참이 도착하면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술 한 잔씩 돌리던 게 당시 인심이라 그도 곧잘 술자리 초대를 받았지만 한 번도 그가 다른 사람에게 술을 사는 일은 없었다. 돈이 생기면 논밭을 사들이는 게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동네에서도 제법 부농 축...
그림·김하나 2010년에 반년 동안 남미의 다섯 나라를 여행했다. 아르헨티나, 칠레, 페루, 볼리비아, 그리고 브라질. 마지막 나라였던 브라질에는 정말이지 그 어떤 나라와도 비교할 수 없는 매력이 있었다. 그건 바로 그곳 사람들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 시내에 도착한 첫날, 터미널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우리 셋에게 어떤 청년이 다가와 영어로 말을 건넸다. “저기 너희들, 여긴...
그림·이수진 영화 주토피아를 관람하다가 배꼽 빠지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나무늘보 공무원인 ‘플래시’가 등장하는 장면에서였다. 용무가 급한 ‘주디’의 사정은 아랑곳없이 느릿느릿 일을 처리하는 모습이 나무늘보의 특징을 압축해 보여주는 것 같아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영화 속 플래시는 두발가락 나무늘보다. 나무늘보는 두발가락 나무늘보와 세발가락 나무늘보 두 종류가 있다. 즉 앞발의 발가락 개수로 구별되...
개인적으로도 다사다난했던 2018년을 돌아보면 첫 번째로 기억나는 것이 1월 초 우리 가족, 부모님, 형네 가족과 함께 떠난 베트남 다낭 여행이다. 4박 5일의 짧은 여행에서 나는 무엇보다 현지 음식에 관심을 뒀는데, 현대 베트남 음식에 녹아 있는 프랑스의 영향을 살펴보는 것이 특히나 흥미로웠다. 베트남은 1858년부터 1954년까지 한 세기 가까이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
“긴급 속보를 말씀드립니다. 내일 정오에 시청역 광장에서 허초희 양을 공개 화형한다고 합니다. 죄명은 남자보다 너무 똑똑해서입니다.” 인터넷 뉴스에서 이와 같은 기사가 뜬다면 누구나 황당한 표정을 지으리라. 그러나 이런 기사를 당연하게 여기던 시대가 있었다. 15세기 유럽에서는 여자가 지나치게 똑똑하면 마녀로 몰아 잔혹하게 고문하거나 화형을 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마녀재판...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들이 있습니다.한겨울 추위를 잊게 만드는 마음속 난로가 있어 우리는 혹한의 겨울이 두렵지 않습니다.01단잠으로 안내하는 엄마의 이불 베개에 머리를 대고 누우면 엄마가 ‘착’ 하고 넓게 펼쳐든 이불이 정확히 내 몸 위로 내려앉는다. “잘 자래이!” 내 옆에 누우며 무심한 듯 인사하는 엄마의 목소리가 이불보다 더 포근하다. 금세 데워지는 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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