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한주연 며칠째 비가 내리고 있었다. 현관을 나선 선호 아빠는 우산을 받쳐 들고 선호의 손을 잡았다. 선호는 다정해진 아빠의 모습이 좋았다. 퇴근만 하면 지하실에 내려가 문을 닫아버렸던 아빠는 두 달 전, 엄마와 선호를 지하실로 안내했다. 그때부터 선호 가족은 달라졌다. 선호 아빠는 티롤 연구원이다. 티롤은 한 알만으로도 하루 영양 섭취량을 갖춘 신약인데 80년 전 론...
그림·한주연 사는 일이 버거워지면 문득 나는 배낭을 꾸린다. 비대해진 전립선과 가늘어진 오줌발과 쉰 넘어 시들해져버린 갱년기까지 마구 배낭에 쑤셔 넣는다. 짊어진 배낭에서는 덜그럭덜그럭 부딪는 소리가 난다. 짐들은 배낭 안에서 저희들끼리 비비고 부딪다 깨져 끝내 먼지가 될 것이다. 이 짐들이 모두 먼지가 되어 날아가야 내 등에도 사뿐 봄이 오겠지. 연골마다 염증이 난 돌계...
남산으로 이어지는 오르막에 자리잡은 화랑에서 내려다보는 경리단길 풍경. 이태원은 외인촌(外人村)이다. 국제도시가 된 오늘날의 서울에서 외국인을 보는 일은 예사가 되었다. 명동이나 홍대앞은 외국인이 압도적이다. 그러니 이제 서울에서 외인촌을 따로 말하는 게 무색하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외국인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으로 서울에서는 이태원이 유일했다. 이태원은 미군부대가 가까...
네덜란드의 게릴라 키친은 버려질 식재료도 구출하고,어려운 사람들 도울 수 있는 여러모로 참 착한 레스토랑이다. 슈퍼마켓에 장을 보러 갈 때면 궁금해지는 것이 하나 있다. 선반과 진열대에 빼곡히 놓인 채소와 과일은 모두 다 팔릴까? 유통기한이 임박해 팔 수 없는 것들은 나중에 어디로 갈까? 대부분은 그냥 버려진다. 이렇게 해마다 버려지는 식재료가 무려 13억 톤에 이를 정...
‘저 바다 너머에는 어떤 세상이 펼쳐져 있을까?’ 제주에서 나고 자란 소년은 집 앞에 펼쳐진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늘 미지의 세계를 궁금해했다. TV 속 화려한 도시가 바다 너머에 있다는 걸 알았을 때는 언젠가 꼭 저곳으로 건너가리라 다짐했다. 한적한 바닷가 마을을 떠나본 적 없는 소년의 눈에 활기찬 서울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국가대표 권투선수가 돼서 섬을 떠나고 싶었는...
그림·지은아 나는 초등학생 때 같은 반 아이들하고만 놀았다. 다른 반 아이들과 친해지는 일은 상상해본 적 없던 나의 세상은 내가 속한 교실이 다였다. 그래서 내 우정은 늘 1년짜리였다. 상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알았는데 나와 같은 반이 아니었다. 어떻게 다른 반이었던 상희와 알게 되어 친해졌는지 첫 만남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지만 6학년이 되어 상희와 같은 반이 되...
경북 안동에 있는 임청각(臨淸閣)은 1519년 건립돼 올해로 500년을 맞은 고택이다. 임청각을 설립한 이는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인데 그의 후손들 중에 상해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1858∼1932) 등 아홉 명이나 되는 독립운동가가 배출됐다. 석주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쉰네 살이던 1911년 겨울, 오십여 명의 식솔을 데리고 만주로 가 신흥학교를 세...
그림·김하나 10년 전, 홍대 앞에 있는 작은 클럽으로 일본의 DJ 겸 음악 프로듀서인 누자베스(Nujabes)의 공연을 보러 간 적이 있다. 당시 회사원이었던 나는 그날따라 좀 지쳐 있었지만 그의 음악을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공연을 놓치기 싫었다. 기대보다 훨씬 근사했던 공연의 분위기에 취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새벽 5시까지 쉬지 않고 춤을 추고 있었더랬다. 주로 힙합음...
그림·이수진 희귀 동물만 전문으로 촬영하는 사진작가 친구와 미국 서부지역을 여행할 때였다. 미국 3대 협곡 중 하나인 브라이스캐니언에서 대거 서식 중인 프레리독과 마주쳤다. 다람쥐과의 작은 포유류인 프레리독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프레리독의 보초 서는 모습에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땅굴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프레리독들은 앙증맞고 귀여운 반면, 보초를 서는 우두머리들...
오늘 점심을 겸한 저녁밥 메뉴는 카레라이스로 정했다. 음식에 쓸 식재료를 확인해본다. 양파는 항상 있다. 당근은 잘 없는데 오늘은 냉장고에 한 개 반이나 있다. 감자는 없지만 가격이 크게 오른 무를 대신해 사놓은 콜라비가 있다. 돼지고기는 없다. 대신 새송이 버섯을 깍둑썰기해 버터에 볶아야겠다. 향긋한 지방을 듬뿍 머금은 버섯은 고기 못지않을 것이다. 재료 준비가 끝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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