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이면 도서관을 찾는다. 서울 광화문 부근 조그만 벤치, 그날은 낙엽 하나가 발단이었다. 의자에 앉아 감았던 눈을 떴는데 나뭇잎 하나가 스르르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니 이철수 선생의 목판화가 떠올랐다. 작가는 떨어지는 붉은 잎 하나를 나무에 새겨 종이에 찍어두곤 〈대전 부르스〉의 가사를 옆에 흘렸더랬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 오래전 보았던...
어린이는 발이 땅에 닿지 않았다. 그러나 한 순간도 불안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꼭 붙어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땀, 그의 숨소리, 그의 등. 어린이는 자전거 뒷자리에 다소곳이 앉아서 흘러가는 자갈을 보며 머리를 기댔다.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새로운 풍경이 그림책처럼 휙휙 넘어갔다. 앞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페달을 밟으며 숨을 색색 몰아쉬는 등이 있었다. 날개가 없지만 부드...
아이를 키우며 종종 내 안의 나를 마주하는 시간에 놓인다. 아이가 유치원생일 때는 유치원 때의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는 5학년 때의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는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내 모습이 보인다. 퇴근해 현관문을 열고 “준서야, 엄마 왔다!”라고 말하며 거실로 들어서던 오래 전 어느 날이었다. 내 목소리를 들은 두 살짜리 아들은 두 팔을 벌리고 알밤이 굴러오듯 통통...
전남 곡성에는 기억 저편 우리네 할머니 집과 닮은 시골집 한 채가 길손을 맞이한다. 벌레가 스멀스멀 기어 다니고, 문틈으로 웃풍이 들어오는 투박한 집이지만 하룻밤 묵고 나면 다음을 또 기약하고 싶어진다. 햇살 가득한 툇마루, 별빛 쏟아지는 앞마당, 아담한 잠자리의 여운이 짙게 남아서다. 집에는 한 가족의 생애가 담긴다. 축복 속에서 아이를 낳고 아이가 무럭무럭 커가는 동안...
내가 사는 앨라배마 지역에는 풍성한 볼거리나 세련된 쇼핑몰이 별로 없다. 그래도 괜찮다. 쓰던 물건을 마당에 내놓고 저렴하게 파는 ‘야드 세일’ 행사나 여러 판매자가 차린 부스가 한데 모이는 개성 넘치는 ‘앤티크숍’이 일상의 무료함을 달래준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물건으로 가득한 앤티크 가게는 몇 번을 방문해도 늘 흥미롭다. 마치 제멋대로 쌓인 물건 속에서 보물찾기하는 ...
사진 수수공방시간은 되돌릴 수 없지만 기억할 수 있다. 추억이 깃든 물건을 정성껏 고치는 사람들에 의해 그 기억은 생생히 살아난다. 그들이 수선하는 건 닳고 낡은 물건이 아니라 소중했던 시절을 간직하려는 마음이다. 인형 디자이너 안성희(44, 수수공방) Q. 인형을 고치는 의사 선생님이시라고요.인형도 아프다니 신기하죠? 해지거나 찢어지거나 솜이 뭉친 상태를 인형...
그림 · 손승배 열심히 달리기 운동을 하고 있는 요즘, 난 영화 〈알라딘〉의 왕자가 된 기분이다. 선선해진 바람결에 몸을 싣고 힘차게 발을 구르면 마치 하늘을 나는 양탄자에 올라탄 듯 상쾌하다. 농구에 푹 빠져서 아침저녁으로 공을 튕기던 중학교 시절 이후로 달리기는 내가 가장 몰입하는 운동이다. 매일 밤, 일과를 마무리하고 아이들을 재운 뒤 운전을 해서 경복궁으로 향한다...
필름 카메라를 처음 샀던 건 3년 전이었다. 어느 날 내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한다고 하자 동료가 물었다. “무슨 카메라 써요?” “저는 핸드폰으로 찍어요.” 사진 찍는 것이 취미라고 말해놓고 변변한 카메라 하나 없다는 게 괜스레 민망했다. “사진 좋아하면 필름 카메라 한 번 써보는 게 어때요? 디지털카메라와는 다르게 셔터를 신중하게 누르게 돼서 사진 찍는 마음이 달라져...
10월의 페어링 추사40 + 구운 삼겹살 가을 술상엔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늘어놓고 싶은 제철 먹거리가 많습니다. 오동통한 알밤이나 영양소가 인삼에 버금간다는 무가 있죠. 하지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건 제철 해산물입니다. 유일하게 반가운 도둑인 밥도둑 꽃게무침, 집 나간 며느리도 다시 돌아오게 만든다는 전어, 고소한 기름기로 입맛을 사로잡는 고등어회, 대하드라마의 주연...
둘 이상의 사람이 함께하는 스포츠를 즐겨본 적이 없다. 몇 년 전부터 여자들이 팀을 이뤄서 하는 스포츠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하고 취미로 하는 운동에 관한 에피소드와 느낀 감정을 기록한 에세이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할 때조차 나는 감흥이 별로 없었다. 출판사들이 ‘브런치’라는 온라인 플랫폼에 올라온 글들을 검토해 출판할 작품을 뽑는 프로젝트에서 몇 년간 운동 에세이가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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