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즉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여름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요즘이다. 한껏 몸을 데우고 악수를 청하는 태양이 민망해할까 봐 웃는 낯으로 대하고 있지만 종종 난 시원해지고 싶다는 바람으로 머릿속에 딴생각을 품는다. 눈앞에는 금세 넓은 수영장이 펼쳐진다. 있는 힘껏 점프해 당장 물속으로 뛰어 들고 싶지만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준비운동부터 한다. 목을 둥글게 돌리고, 허리도 스트레...
기억은 종종 흙의 향기를 타고 밀려 들어온다. 어느 초여름 날, 마당에 쪼그리고 앉아 잡초를 뽑는 중이었다. 민들레 줄기를 손에 감아쥐고 매몰차게 잡아당기니 향긋한 흙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러자 곧이어 타임머신에 올라탄 듯 몸이 붕떠서는 휘리릭 날아가 과거의 그날에 안착했다. 아들은 손에 빨간 자동차를 쥐고 있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카(Cars)〉의 주인공 ‘맥퀸’이다...
나는 1991년에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 ‘슈퍼전대 시리즈’와 더불어 로봇 만화를 보며 유년기를 보냈다. 텔레비전을 켜기만 하면 〈로봇수사대 K-캅스〉 〈지구용사 선가드〉 〈그레이트 다간〉 〈철인 28호〉와 같은 로봇 만화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인간같이 생겼지만 인간보다는 훨씬 큰 로봇과 소년이 함께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이야기. 악의 무리는 어쩜 그렇게 매주 지구를 침략...
내가 왜 몰랐을까? 진작 눈치를 챘어야 했는데. 최근엔 이런 적이 거의 없었거든. 아무 문제도 없었어. 고요하고 태평한 생활이 지속됐으니까. 그런데 또 이런일이 일어난 거야. 무슨 일이냐고? 집사들이 아무 말도 없이 며칠씩 집을 비우는 일! 자기들은 ‘여행’이라 부르지만 내가 보기엔 ‘무단가출’이 분명한 이 몹쓸 행태를 어떻게 생각해? 화가 났냐고? 내가 화가 났는지 묻는 ...
“바쁘지 않으면 이것 좀 볼래요?”평소 알짜배기 정보를 알려주길 좋아하는 동료 선생님이 스마트폰을 내밀었다. 화면엔 주식 차트가 있었는데, 주식을 모르는 내 눈에도 큰 수익이 난 것으로 보였다. 그녀는 요즘 주식으로 월급의 몇 배인 돈을 벌고 있다며 흐뭇해했다. 원체겁이 많은 성격인지라 남들 다 하는 가벼운 투자도 시도조차 하지 못하던 난 그 말에 혹해 처음으로 주식을 한 ...
AI가 점점 우리의 일상생활에 친숙하게 활용되는 요즘이지만 문과생인 나에게 로봇은 여전히 미지의 존재다. 하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안다. 바로 로봇에게는 영혼이 없다는 점이다.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이름만으로도 논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전시명인 ‘영혼은 없고 껍데기만’은 1999년 진행된 예술 프로젝트의 제목으로, 사이보...
일본 규슈의 대표 도시이자 돈코츠 라멘의 본고장인 후쿠오카로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이번 여정은 한 마디로 첨단 기술에 대한 신뢰도가 뚝 떨어진 여행이었다. 스마트폰, 키오스크 같은 기기를 믿었다가 낭패 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료칸에서 첫날 밤을 묵고 길을 나선 아침, 다른 도시로 이동하기 위해 열심히 구글맵을 들여다보며 도착한 곳은 버스 정류장이 아니라 고속도로 위였다....
‘하스타 웃타나 아사나’ 자세 ‘우드르바 다누라 아사나’ 자세©정승원 초등학교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통틀어서 결석한 적이 한 번도 없다. 늘 반에서 1, 2등을 도맡아 선생님께 칭찬을 받았고,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꽤 좋은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은 나처럼 열정적으로 살거나 강한 신념을 추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자주 소외감을...
무니야, 나는 평소 행복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는 사람이야. 행복을 아는 것과 행복을 겪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고, 행복의 표준을 제시하고 강요하려는 온갖 말들의 반대편에서 나만의 정의를 내리고자 애써왔어. 그런데 이상하지, 갈수록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어려워지는 것 같아. 전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분명한 편이었는데 이제는 나를 솔직하게 드러내는 일이 버거워지...
붉은 속살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자 달콤한 과육이 입속에서 뭉그러진다. 수박에서는 여름의 맛이 난다. 주르륵, 과즙이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사각 베어 문 여름이 단물이 되어 목을 타고 내려간다. 나는 과일 중 수박을 가장 좋아한다. 수박을 먹을 적마다 무더웠던 여름의 아련하고 달콤한 기억들이 깨어난다.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엄마는 무슨 자신감에서였는지 빚을 잔뜩 지고 ...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