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트 라이브즈〉의 노라에게 노라, 모처럼 하고 싶은 말이 차고 넘치는 영화를 만났습니다. 극장은 건물 9층에 있었는데, 상영관을 나서자 통유리 너머로 8차선 도로가 내려다보였습니다. 아득해져 눈을 질끈 감았다 떴습니다. 레고 조각 같은 사람들이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지요. 그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나는 어떤 시간의 강물을 건너 여기에 도착해 있...
거실창 작은 발코니 난간에 새들이 날아와 앉기 시작한다. 몇 번을 쫓아도 그때 뿐, 다시 몇 마리고 날아와 철 난간을 밟고 찰그락 찰그락 돌아다니거나 푸드덕 날갯짓을 해가며 내 신경을 산만하게 흩어 놓는다. 나는 환기를 적당히 시키고 창을 닫아 버린다. 어느 순간 무상동거를 묵인해 버리고 있다. 무단 점거범들과의 동거는 6년 전 윗집 어르신 부부가 이사오고 나서부터 시작됐다...
친한 시인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꽃이 피었어’ 시 쓸 때의 습관 때문인지 서술어 뒤에 마침표가 빠져 있었는데, 문장이 끝나지 않아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사랑한다는 말도, 보고 싶다는 말도 없었지만 마침표가 빠진 공백에서 애틋함이 묻어났다. 친한 친구끼리도 SNS로 소통하고 안부를 묻는 요즘,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오는 그이의 정다운 말이 그리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내...
“너는 요즘 무슨 재미로 살아?” 2년 만에 만난 친구, 승우의 질문에 흠칫 놀랐다. 우리도 이제 ‘중년의 위기’라는 표현을 쓸 때가 된 건가. 잘살고 있다고 생각했던 승우가 사뭇 진지한 어조로 물어 요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지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다행히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라던 승우의 질문은 그간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이라서 나는 그만 입에서 나오는 ...
2024년 1월 23일, 바람이 차가웠던 아침에 나는 팬티 바람으로 앉아 노트북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브라우저 창에 나타난 ‘결제 취소’ 메시지에 헛웃음이 나왔다. 고작 네 글자로 사람을 이리 화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단전에서부터 솟아오르는 열을 누르며 다시 구매를 시도했다.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결제창이 떴다. 어버버하며 입력해 둔 카드 정보를 확...
, 김은미 단발머리 여학생이 교복 재킷 위로 책가방을 메고 계단을 오른다. 내용물이 가득 찬 가방은 지퍼가 팽팽하게 당겨져 톡 치면 뜯어질 것만 같다. 그 무거운 가방을 멘 여학생은 3층 화실까지 걸어 올라간다. 육중한 문을 열고 화실로 들어간 소녀는 구석에 가방을 내려놓고 사물함에서 연필과 칼을 꺼내 휴지통 옆에 선다. 커터칼로 연필을 깎기 시작하자 껍질이 메뚜기처럼 폴...
내가 뉴스를 챙겨보는 ‘인텔리 묘(猫)’라는 것은 전에 말한 적 있던가? 매일 아침 집사들이 사과나 요구르트를 먹으며 뉴스를 볼 때 나도 같이 앉아서 보거든. 뉴스를 봐도 재미있는 소식이나 귀가 솔깃해지는 정보는 거의 없지만. 요새 남 집사는 AI 기술 발달로 반도체 사업이 각광받고 있다며 주머닛돈을 주식에 투자했다고 하더라. 아침 9시, 장이 열리는 시각에 맞춰 주식 관련...
내가 해외 컬렉션을 처음 접한 시기는 2001년쯤이었다. 캐주얼한 의상과 힙합 스타일만 소비하던 나는 일본 패션잡지를 접하면서 여러 외국 디자이너의 패션에 매료되었다. 일본어를 해석할 길이 없어 당시 일어 자격증 소지자였던 큰 누나에게 번역을 부탁한 후에야 내 눈을 사로잡았던 옷들이 유럽에서 활동하는 디자이 너들의 브랜드라는 사실을 알았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한국은 ...
5월의 페어링 그림 · 모조핀 지란지교+쭈꾸미 볶음 ‘지란지교’는 약주, 탁주, 무화과 탁주로 즐길 수 있습니다. 저는 이 중에서 약주를 제일 좋아해요. 지란지교 약주는 술덧을 여과하지 않고 맑게 뜬 윗부분을 담는 방식으로 만들어지는데, 그래서인지 다른 약주에 비해 살짝 탁합니다. 새콤하게 혀를 지나간 뒤 뒤늦게 올라오는 달콤한 여운에 홀려 홀짝홀짝 마시다 보면, 잘 익은...
1960~70년대 학림다방 스케치 ©정구원 대학로 하면 학림이고, 학림다방 하면 비엔나커피다. 커다란 궤짝 스피커에서 울리는 장중한 클래식 음악보다도, 이 다방을 배경으로 찍었다는 드라마의 멋진 장면보다도 새하얀 크림을 도톰하게 얹은 커피 한 잔의 기억이 더욱 힘이 세다. 비엔나커피는 마차를 몰던 시절 오스트리아 빈에서 마부들이 추울 때 마셨던 음료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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