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연의 냉장고는 항상 무언가로 가득하다. 먹다 남은 반찬이며, 한 입 베어 문 베이글, 기념일이나 생일에 받은 각종빵과 제과들이 한데 엉켜 커다란 덩어리를 이루고 있다. 내가 보연의 집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냉장고를 열어보는 일이다. 그 속이 얼마나 꼬여있는지, 바라보면 내가 알지 못하는 보연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보연은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낸 오...
미국의 한 중학교에서 어떤 소년이 ADHD 판정을 받았다. 이 소년은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나 성적 미달로 중퇴했다. 소년은 음주 허용 나이가 되기도 전에 아빠가 되었고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최저 임금을 받는 일자리를 전전했다. 그럼에도 학업에 정진해 웨버 주립대학에 입학한 그는 식구를 건사하기 위해 2년 동안 낮엔 베이글을 굽고 가전제품을 팔며 밤마다 공부했다. 극심한 생활고...
대한민국 1호 기록학자이자 지식 크리에이터인 김익한 교수. 그의 기록 철학에 빠져드는 순간, 우린 더 이상 ‘어제’를 죽은 시간으로 방치하지 않아도 된다. 새로운 하루가 발전적으로 흐르도록 어제를 멈추지 않고 열심히 움직이게 만드는 비법을 그는 알고 있다. “메모를 생활화하면 삶이 달라져요. 유능해지고 자유로워지고 즐거워지죠. 하루에 10분 정도만 들이면 일주일이 바뀌고 1...
자신의 삶을 표현할 수 있는 음식을 꼽으라고 하면 황인철 씨에겐 단연 미역국이다. 따끈한 국물 한 그릇에 새 생명의 기쁨과 축복이 가득 담겨있으니 말이다. 그가 산부인과 의사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 무수히 마주친 행복들은 탄생의 순간처럼 빛이 난다. 생일 아침에 부스스한 잠옷 차림으로 식탁에 앉으면 다정하게 잠을 깨우던 음식이 있다. 바로 소고기 미역국이다. 오래 끓여 진...
버스 짐칸에 놓여있던 가방을 받아 든 시각은 새벽 여섯 시. 비가 내리고, 무척 춥다. 공항에서의 사람은, 누군가를 마중 나온 것이 아니라면 닿을 곳의 날씨를 신경 쓰기 마련이다. 날씨뿐 아니라 시간 또한. 그곳은 한밤이겠구나. 그 밤은 어제의 밤이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다. 옷깃 사이로 한기가 스며든다. 부르르 몸을 떤 다음에야 나는 그곳의 생각에서 놓여난다. 비행기가 출...
- 네이처 오브 포켓팅 -장소 대학로아트원씨어터 2관 가격 S석 45,000원 / R석 60,000원 공연 기간 1월 28일까지의자에 한 노인이 앉아있다. 그의 이름은 ‘톰’이다. 톰은 금방이라도 까무룩 잠들 것처럼 눈에 초점이 없고, 말이 없다. 그런 그를 옆에서 돕는 건 딸 ‘소피’ 뿐이다. 그녀는 쉰다섯 번째 생일을 맞은 아버지를 위해 파티를 준비하지만, 치매에 ...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무여 스님은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보리선원의 주지이자 사찰 여행 채널을 운영하는 유튜버다. 스님에게 가장 효율적인 수행법은 사람들과의 다정한 소통. 속세와 연을 이어가며 스님이 깨달은 기쁨이 충만한 삶의 비결은 무엇일까. 무여 스님 벽에 걸린 그림 속 연꽃이 마치 사람으로 환생해 눈앞에 앉아있는 듯한 감흥이 일었다. 그녀의 얼굴에 번지는 미...
신정을 쇠는 우리 가족은 12월의 막바지만 되면 분주하다. 새로운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고자 대청소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치된 집안 곳곳을 샅샅이 정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기에 우리 가족에게 매년 12월 31일이란, 모두가 나서서 서로를 도와줘야 하는 날이다. 빨리 청소를 끝내야 느긋한 연휴를 맞이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작년 12월, 그러니까 2022년...
나는 기다린다, 약속이 되어있다는 듯. 그런 기분이 들면 꼼짝할 수 없다. 시계탑 아래서 초조한 사람처럼. 마음의 각도가 아슬해지고 애틋해지면 가까운 창문으로 가보는 것이 상책이다. 창밖 거리는 비어있다. 겨울은 있던 것이 사라져가는 사건이 아닌가. 그러면서 나의 기다림과 창밖의 비어가는 겨울을 대어놓고 닮은 점을 찾고 있다. 이를테면 정류장의 빈 의자. 저것...
그곳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만보 걷기를 실천하겠다고 마스크를 쓴 채 동네를 산책하던 지난가을,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도 길을 잃었다. 사는 동네에서 길을 잃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누군가는 비웃겠지만 길치인 내겐 흔한 일이었다. 길을 헤매느라 만보계의 숫자는 쉽게 만오천, 이만을 넘어가곤 했다. 더군다나 그날은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와서 지도조차 볼 수 없었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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