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초여름, 병원 출근길이었다. 버스에서 급히 내리다가 오른쪽 발목을 접질리는 바람에 반깁스를 한 채 휠체어를 타고 내가 일하는 병동 15층에 내렸다. 그러자 40대 초반에 긴 생머리의 그녀가 눈을 크게 뜨고 다가왔다. “교수님, 어쩌다 이렇게 되셨어요?” “출근하다가 발목을 다쳤어요.” “저런, 진료실 앞까지 밀어드릴게요.” 의사가 탄 휠체어를 환자가 밀...
바다와의 이별 주제곡 사람과의 이별만큼이나 나는 계절과 헤어지는 일이 아쉽다. 제철 음식이 있듯 그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제철 행복’이 있다고 믿는 나는 사시사철을 예민하게 감각하려고 노력한다. 여름과 석별의 정을 나누는 일은 대개 바다와 인사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내 기억 속 바다와의 이별 장면에서는 항상 비가 내렸다. 얼마 전, 부산으로 떠난 늦은 휴가에서도 이틀...
도서관에서 발견한 ‘들국화’ 의 음악성 1980년대 4인조 록밴드 들국화의 〈행진〉은 ‘아는 만큼 들린다’라고 주창하고 싶게 만드는 가요다. 밴드의 전성기를 지켜보지 못한 내겐 보컬 전인권이 ‘정돈되지 않은 가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한국 록 음악의 전설’이라 추앙받아도 더벅머리에 짙은 선글라스를 쓰고 거칠게 갈라지는 목소리로 ...
회색 벽돌집을 처음 보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결혼 후 강남 한복판에 있는 원룸 오피스텔에 신접살림을 차렸다. 결혼과 동시에 남편과 나 둘 다 특수 대학원에 진학할 계획이어서 신혼집은 직장과 대학원의 중간에 위치하면서 관리가 편해 보이는 곳으로 골랐다. 방이 몇 개인지, 재테크 효과가 있을지 그런 조건은 고려 대상이 되지 않았고 오로지 실용성이 중요했다. 그...
음악을 미술만큼 좋아해 음악을 그림에 접목하려는 시도를 한 화가들이 꽤 여럿 있다. 칸딘스키는 아놀드 쇤베르크 같은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아 회화 시리즈의 제목을 ‘즉흥’ ‘구성’ 같은 곡명으로 붙였고, 클림트는 베토벤을 흠모해 그에게 헌정하는 〈베토벤 프리즈〉라는 작품을 그렸다. 본업이 작곡가인데 미술에 도전해 화가로 활동한 사람도 있다. 우리에겐 조금 생소한...
어색한 사이 둘이 마주 앉으면 묻곤 하는 질문이 “어디 사느냐” “고향이 어디냐” “취미는 무엇이냐”였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이같이 직접적인 질문을 건네는 것이 결례 혹은 실례가 되는 듯싶다. 두루두루 연결되어 있는 초근접 사회에서 누군가의 개인정보란 집 열쇠에 버금가는 무언가인 까닭이다. 그렇다고 어색한 사이로 마주앉을 일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고, 타인의 삶에 관심...
파벨만스의 새미에게 새미, 저에게 올 상반기는 이별의 계절로 기억됩니다. 제가 너무나 사랑해 마지않는 두 예술가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에요. 지난 3월에는 류이치 사카모토가, 7월에는 밀란 쿤데라가 우리에게 작별을 고했지요. 대학 시절 이들의 예술 작품에 기대어 자랐던 저로서는 영혼의 일부가 떨어져 나간 듯 눈동자가 흔들리고 발밑이 꺼졌습니다. 세상에 비통하지 않은 죽음은 없다...
갑자기 전화를 걸어온 엄마는 내게 여수에 가자고 말했다. “여수? 갑자기?” 묻는 내게 엄마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궁금해졌다고 답했다. “왜? 갑자 기?” 내가 다시 한번 물었을 때 엄마는 조금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가 소설에 썼던데. 몇 번이나, 여수를.” 나는 아차 싶었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날짜를 정하고 숙소를 예약하는 동안 묘한 기분이 들었...
때로는 꽃 앞에서 자신의 고민도 털어놓고 세상 사는 이야기도 두런두런 나눠보라. 짐이 훨씬 가벼워지고, 꽃한테서 많은 위로와 가르침을 받게 될 것이다.- 법정 스님 《홀로 사는 즐거움》 중 - 간밤의 요란한 빗소리에 농작물이 걱정되어 이른 아침 텃밭을 둘러보았다. 불어난 물길에 밭둑 일부가 무너지긴 했으나 농작물은 큰 피해가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활짝 핀 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규영(39) 씨에게 ‘밥’은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했지만 오늘날의 그에겐 행복을 보호하는 방화복이 됐다. 금방이라도 마음이 허물어질 듯한 날,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의 안녕을 빌며 차리는 밥 한 끼가 그 무엇보다 든든하다. “오랜만에 김밥을 만들려니까 떨리네요. 원래 눈 감고도 만들었는데, 시간이 많이 흐르긴 했나 봐요.” 일회용 장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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