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타너스의 그늘에 섰다. “이 나무가 나오는 오페라를 불러보겠습니다.” 숲 해설을 들으러 온 참가자들은 무슨 일이냐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옴브라 마 이 푸 디 베제따빌레(Ombra mai fu di vegetabile)”. 다들 실망이 컸다. 덩치만 보면 가곡 좀 부를 것 같은데 영락없는 음치다. “이 노래는 헨델의 오페라 〈세르세〉 시작 부분에 나오...
대학교 2학년 여름방학, 날은 덥고 별다른 일이 없는 무료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방학 전에는 나도 거창한 계획이 있었다. 영어 공부도 하고 책도 많이 읽고 이것저것 공부도 해야겠다는. 그러나 그 모든 결심은 작심삼일로 끝나기 일쑤였고 운동은 아예 시작도 못한 채 시간만 흘렀다. 하루는 그런 나를 보다 못한 엄마가 지나가듯 한마디 했다. “말만 하지 말고 뭐...
매일 공부하는 나날을 꿈꾼다는 내용으로 책 한 권을 채웠더니 공부를 몹시 좋아하는 할머니로 보인 걸까? 내 얼굴만 보면 요즘엔 무슨 공부를 하느냐 묻는 지인이 부쩍 많아졌다. 평소에 늘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으로 비친 듯하여 괜히 양심에 찔린다. 너무 공들이다가 기대에 부응하는 결과를 얻지 못해 자신감이 대폭 줄어드는 경험을 몇 번 겪고 ‘대충’과 ‘건성’이 배움의 자세가...
경복궁추위가 아직 가시지 않은 지난 3월, 광화문 앞 문화재 발굴 현장을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경복궁 중건 시기에 조성된 넓은 기단 형식의 대(臺)인 월대(月臺)를 복원하는 현장이었는데, 조사 과정에서 1917년에 개설돼 1960년대까지 사용된 전차로를 확인한 것이다. 세종로 도로가 생기면서 묻혔던 전차로 아래엔 일제강점기에 매설된 콘크리트 배수로와 함께 ...
사람의 손이 두 개인 이유를 많은 사람들은 세계적인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을 통해 알았다. 한쪽은 자신을 돕기 위해, 다른 한쪽은 다른 이를 돕기 위해서라며 일평생 가난한 자들을 보듬었던 그녀의 주름진 손이 또 한 명의 여배우에게 오버랩된다. 김정화 음악가 바흐가 ‘천 번의 키스보다 황홀하고 포도주보다 달콤하다’고 묘사했던 커피가 오늘따라 더...
ⓒ 손묵광 [밀양 표충사 삼층석탑] 사명대사 이름을 딴 절이면 되었지석탑 하나 선 자리가 뭐 그리 중할까이 몸은요사체 지키는문지기면 족하다네 영남알프스 산군 중 하나인 재약산(1119m)에 오른다. 산세가 부드럽지만 한여름 뙤약볕이 산객의 진땀을 빼낸다. 산에서 내려온 이들은 어김없이 천년고찰 표충사에 들러 목을 축인다. 1200년 전 몹쓸 병에 걸린 신라 흥덕왕 셋째 ...
특집_그리운, 가요뮤지컬로 듣는 가객의 노래다시, 동물원 장소 혜화 ‘동덕여대 공연예술센터’기간 9월 17일까지러닝타임 110분 “사람들이 제 노래를 듣고 한 번쯤 ‘아, 나도 저런 때가 있었지?’ 하고 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면 제 노래 인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고 봅니다.” 월간 《샘터》 1995년 9월호 인터뷰에서 가수 故 김광석이 했던 말을 오랜만에 떠올린 건 뮤지컬...
엄마와 함께한 여름의 울림 엄마는 자주 넘실거렸다. 금세 달아올랐다가 식는 주전자 눈금처럼. 별일 아닌 일에도 쉽게 달아오르며 성을 내는 탓에 엄마를 마주하기가 괴로웠다. 갱년기 증상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도, 잠을 못 이룰 때도 있다고 토로했다. 나는 그런 엄마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려 했다. 직장과 글, 빡빡한 일정을 병행하느라 그녀에게 마음을 내어줄 여력도 여유도 없...
혼자 서점을 돌보아야 하는 일요일 오후가 되면 늘 같은 고민에 빠진다. 햄버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한 끼 간편하게 때우기 그만인데다가 냄새도 덜한 편이라 서점 내부 식사 메뉴로 적당하다. 서점 운영 7년 차. 바빠서, 귀찮아서 그동안 배달이나 포장 주문으로 먹은 햄버거의 수는 얼마나 될까. 영화 대사를 빌리자면 “이열 종대로 연병장 두 바퀴”까진 과장일 테...
슬픔은 나누면 반이 된다던데, 슬픔이 찾아오는 날에 나는 오히려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친다. 동굴 속으로 들어가 울음이 잦아들기까지 그저 기다린다. 이는 내가 슬픔을 이겨내고, 기억에 새기는 방법이다. 어떤 사람들은 슬픔을 나누기 위해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이야기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위로받고 마음을 치유한다. 그것은 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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