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친한 지인으로부터 모빌을 선물받았다. 모빌은 인테리어 소품 정도로만 여겼었는데, 바람에 댕그랑댕그랑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마음이 느슨해지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모빌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더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그래서 난 지금도 종종 멈춤의 순간이 필요할 때마다 선물 받은 모빌을 바라본다. 모빌은 내게 공간을 빛내주...
부모님의 취미를 대물림받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하던데, 아쉽게도 나에겐 그런 행운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만의 그럴싸한 취미를 갖고 싶었던 나는 직접 취미를 찾아 나섰다. 그러다 발견한 취미가 우표수집이다. 나는 내 취향이 가득 담긴 우표첩을 한 권 한 권씩 채워나갔다. 우표가 바코드 스티커로 대체되는 세상이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우표는 그림이 그...
5월의 마지막 날, 학교에서 경북 포항으로 야영을 다녀왔다. 수련회가 아닌 야영을 가보는 것은 처음이라 설렜지만, 낯선 곳에서 텐트 하나에 의지한 채 하룻밤을 보내야 한다는 사실이 무섭기도 했다. 더군다나 포항에 가까워지자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세워놨던 계획들을 하지 못할 것 같아 다들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의 불안함이 모여 먹구름을 ...
차를 건성으로 마시지 말라. 차밭에서 한 잎 한 잎 따서 정성을 다해 만든 그 공을 생각하며 마셔야 한다. 그래야 한 잔의 차를 통해 우리 산천이 지닌 그 맛과 향기와 빛깔도 함께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 법정 스님 《오두...
영화 킹스스피치에는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사람들 앞에만 서면 말이 나오지 않아 연설을 두려워하는 ‘버티’와 스피치 기술을 전수해 그를 연설가로 만드는 ‘라이오넬’이다. 스피치 전문가 정흥수는 두 주인공의 면모를 모두 지녀 흥미로운 인물이다. 정흥수 어제보다 오늘의 ‘나’를 한 뼘 더 성장시키고 싶을 때 어떤 실력부터 향상시키면 좋을까? 최근에는 말하기에 대한 관심...
Cherry Sage 오전 11시, 거실 모서리의 ‘ㄱ’자 유리창으로 햇빛이 밀물처럼 넘실거리며 들어와 흰 벽, 흰색 마루에 부딪혀 아이보리 색 실크 원피스처럼 은은하게 빛났다. 눈을 반쯤 감고, 부드러운 빛의 촉감을 즐겼다. 빛의 온도와 공기의 습도가 마치 솜사탕처럼 달콤하고 포근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시간이었다. 티테이블 위에 쌓인 책 중 한 권을 골라 ...
창경궁 대온실 밤에 궁궐을 거닐어본다. 일몰을 지나면서 어둠이 내려앉은 궁궐은 낮과는 다른 얼굴이다. 공간이 더 깊고 넓어진 것은 단지 느낌일까? 많은 담장의 모서리에서 묘한 존재들이 불쑥 나타날 것만 같다. 낮 동안 역동적이고 쓸쓸한 역사의 현장이 밤엔 환상과 모험의 장소로 얼굴을 바꾼다. 낮엔 역사가의 시간이, 밤엔 소설가의 시간이 궁궐에 흐른다. 창덕궁이...
비가 오는 일을 작은 재난처럼 여기던 날이 있었다. 학교 다닐 때, 비가 오면 그 사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우산을 가져가지 않기라도 한 날엔 하교를 알리는 종소리가 무겁게 들렸다. 아이들이 저마다 가져온 우산을 펼치고 소란스레 학교를 나서면 학교 중앙현관에는 꼭 우산 없는 아이들이 모였다. 누군가를 기다리다가 뒤늦게 마중 나온 이의 우산을 쓰고 돌아가는 아...
내가 아이였던 때의 일을 말해 보려 한다. 노스트라다무스와 사오정이 나란히 유행했던 그때는 바야흐로 세기말이었다. 그 시절 우리 가족은 무척이나 오래된 빌라의 2층에 세 들어 살았다. 1층 집이 반지하였으므로 사실상 우리 집은 1층이나 다름없었다. 말하자면, 꼭 그해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빗물에 잠기고야 말았을 그런 집이었다. 경기북부에 유례없던 폭우가 ...
당신에게 비 내리는 날은 어떤 날인가요? 주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하면 크게 두 가지 중 하나의 답변이 돌아온다. 하나는 밖에 나가기도 귀찮고 신발이 쉽게 젖어버려 기분이 좋지 않은 날, 다른 하나는 운치와 청량감이 느껴지는 날이라는 대답이다. 내게 비 내리는 날은 추억 속 얼굴이 생각나는 그리움의 시간이다. 10년 전쯤, 군 생활을 하면서 만난 형의 잔잔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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