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동경하는 할아버지는 돌아가지 못할 과거 속에서 존재한다. 손만 뻗어도 닿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 너머에는 내가 절대 알지 못할 세계가 존재하기에 지금 당장 감히 닿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건 마지막 순간까지 나를 잊지 않았던, 이제는 내가 마지막 순간까지 추억할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다.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두 눈으로 다 담지 못할 만큼 큰 화물선의 ...
The Kiss(Constantin Brancusi,1907-1908, 27.9×26×21.6cm) 두 사람이 꼭 안고 있다. 서로가 합쳐져 하나의 돌이라도 되는 것이 목표인 것마냥 떨어지려 하지 않는다. 반쪽씩만 보이는 둘의 눈은 하나가 되어 외눈박이가 되었고, 한쪽씩 보이는 팔은 한 사람이 스스로를 안은 자세처럼 보인다. 그렇게 둘은 하나가 되었고, 다시는 ...
김 선배의 전화는 샤워 후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털고 있을 때 걸려왔다. 나는 수신자의 이름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퇴근 후 걸려오는 전화는 대다수 유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사이 전화가 끊어졌다. 냉장고에서 캔 맥주를 꺼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려 댔다. 식탁에 캔 맥주를 내려두고 전화를 받으니 아니나 다를까, 김 선배가 내게 간곡히 부탁...
소풍 가서 하는 보물찾기가 재미없었던 이유는 내가 찾은 게 보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책, 필통, 물감 세트는 보물이 아니다. 재미가 없으면 열의를 갖지 못해서 남들이 보물찾기 하는 동안 난 그냥 설렁설렁 돌아다녔다. 친구들도 각종 학용품이 보물이 아닌 건 알았을 거다. 그래도 ‘찾기’가 재밌어서 열심히 한 건데, 나도 그 재미를 알았다면 좋았을 뻔했다. 지금...
창덕궁 연경당 ‘동궐도(東闕圖)’는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든 전각을 그려놓은 조감도식 그림이다. 순조 연간인 1830년대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전각의 모양이 정교하며 연못, 나무, 상징성을 담은 기물까지 모두 그려졌다. 나는 화첩 형태로 된 동궐도를 갖고 있는데 펼칠 때마다 담장과 문에 시선이 간다. 조선은 담장의 나라였다. 수많은 전각이 저마다...
흔히 받게 되는 선물 가운데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는 것이 화분 아닐까. 관련 지식도 많고 손길도 다정하여 집을 화원처럼 만들어놓고 분주히 가꾸는 이들도 있으나,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은 소위 ‘식물 저승사자’ 군에 속할 것이 분명하다. 그저 번거롭고 귀찮기만 하면 좋으련만. 식물은 당연히 생물이어서 살아내는 한편 죽기도 할뿐더러 그 품새가 하도 극적이어서 마음 깊이...
데이비스, 당신은 부수는 사람입니다. 얼마 전 당신은 끔찍한 사고를 당했습니다. 사람들은 걱정스레 물었지요. 괜찮아요? 괜찮습니까? 상실 앞에 놓인 사람에게는 참으로 폭력적인 말입니다. 괜찮다고 말해도, 괜찮지 않다고 말해도 난처하긴 매한가지일 테니까요. 데이비스, 당신은 그 사고로 아내를 잃었습니다. 빈자리를 보아도 눈물은 나지 않습니다. 슬픔의 방향이 하나라고...
아홉 살 생일을 앞둔 나는 그간 분주한 날들을 보냈다. 매일 할머니 담배 사오기, 이웃집에 음식 갖다 주기 등 여러 집안 심부름을 했고 아침에는 오빠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강아지가 물어간 신발들을 찾아 제자리에 놓았다. 생일날 꼭 받고 싶은 선물이 있었기에 가족들의 환심을 사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우리 집은 할머니 빼고는 생일선물을 따로 챙겨 받는 사람이 없었다. 부...
어린 아이의 얼굴을 발견하는 건 때로 그 나이를 훨씬 지난 노인의 얼굴에서도 가능함을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서 깨달았다. 별을 보며 몇만 광년 전 시간을 헤아려보던 아이의 얼굴을 환갑이 넘은 천문학자의 얼굴에서 보았고, 산골마을 언덕 위로 비행기가 지나갈 때면 먼 나라의 아침을 꿈꾸던 꼬마 아이의 얼굴을 40대 여행작가의 얼굴에서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201...
사무실을 나와 차를 타고 10여 분, 서울을 벗어나 집 근처에 다다랐다. 서울에서의 아파트 생활을 청산하고 이곳 경기도 양주 장흥면에 작은 집을 지어 이사 온 지 4년이 넘었다. 이제 나의 늦은 퇴근길을 밝히며 반겨주는 건 창백한 도로의 가로등이 아니라 밤하늘에 뜬 달이다. 마을 어귀를 돌아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달은 이 산 저 산을 옮겨 다니며 나를 내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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