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당주(當主). ‘현재의 주인’이란 뜻이다. 이웃 이모가 지어줬다. 내가 이 집에 도착한 날, 냉큼 이름부터 지어 보냈다. 이름이나 제목 짓기, 누군가의 운명에 빛 한 줌을 보태는 일을 낙으로 삼는 사람임이 분명하다. 고양이라면 그쯤은 그냥 안다. 이름은 단박에 마음에 들었다. 흔한 이름은 질색인데다, 나는 과거나 미래엔 관심이 없고 언제나 현재를 향유하는 편이니까...
“잘 인나. 아드른 잘 크나.” 그 날은 유독 밤더위가 심한 날이었다. 설상가상 에어컨도 고장이 나서 칭얼대는 아이들을 재우고자 한 손으로는 부채질을, 다른 한 손으로는 그 단순 작업의 지루함을 이기고자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참이었다. 휴대폰 상단에 새로운 메일 표시가 떠서 무심코 눌러보니 처음 보는 발신주소다. ‘제목 없음’에 첫 줄부터 맞춤법이 어긋나 있다. 어디선가 ...
이사를 간다. 이 집으로 온 지 8년 만의 일이다. 결혼하고 처음 자리 잡은 곳은 309-90번지였다. 빛이 잘 들어오지 않는 10평 남짓한 집이었다. 창밖으로 손을 뻗으면 옆집 담벼락이 손끝에 닿을 거리에 있었다. 안방 창문과 옆집 화장실 창문이 가까운 탓에 밤에 자려고 누우면 샤워 소리, 볼일 보는 소리가 다 들렸다. 늦은 시간 들리는 물소리에 ‘옆집 사람이 늦게 퇴근...
골목으로 들어갔다. 골목 안쪽 바닥엔 시멘트 블록이 깔려 있었다. 맑은 날은 괜찮았지만, 비 온 다음엔 블록이 헐거워져 뒤뚱거렸다. 자칫 잘못 디디면 블록 아래 고인 흙과 빗물이 섞여 옷에 튀기기 십상이었다. 엄마가 푹푹 삶아 눈이 부실 정도로 새하얘진 양말을 더럽힐 순 없었다. 블록 가장자리를 발로 살살 눌러본 다음, 흔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조심조심 발걸음을 ...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가면 꼭 그 나라에서 생겨난 브랜드의 매장에 들른다. 낯선 타국에서 그 나라만의 특색이 묻어나는 로컬 브랜드를 발견하면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듯 심장이 쿵쾅쿵쾅 뛴다. 집에만 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브랜드들이 새로운 길에서 나를 반겨주니 ‘역시 사람은 움직여야 발전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바로 마케터의 살아있는 여행이지 싶어서...
국내 여행을 다닐 때면 일부러 지역의 큰 절을 찾는다. 산속에 자리를 잡은 사찰 사이로 산책을 하다 대웅전 앞에서 희미한 향냄새와 목탁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평안해지곤 한다. 해외에선 성당의 두꺼운 문을 열고 들어가 기도하는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아 공간을 유심히 살피기도 한다. 이렇듯 머묾만으로 치유가 되는 공간들이 있다. 특히 종교 건축은 어떤 방...
내가 베이스기타를 배우기 시작한 건 1년도 채 되지 않은 일이다. 예술고등학교에 입학한 무렵에는 전공이 작곡이었지만 여름방학이 되기 전에 바꾸었기 때문이다.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지만 그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준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내가 처음 산 기타로 짧은 연주를 들려주었고 진로를 고민하던 나에게 그 선율은 특별했다. 학창시절에 밴드에서 건반을 연주...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의 한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마당을 비추는 햇볕은 맑고 방안에 감도는 분위기는 포근하여 일상에서 쌓인 피로와 긴장이 속절없이 녹아내렸다. 초봄의 포근한 햇살에 기분 좋은 나른함이 감돌던 오후, 전북 남원 시내에서 2-231번 버스를 타고 여원재로 향하는 길이었다. 운봉읍과 이백면 사이, 해발 477m에서 푸른 하늘을 지붕처럼 드리...
어려운 문제를 눈앞에 두었을 때 회피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다. 배우 윤소희는 후자에 해당한다. 연기가 던지는 난제들 앞에서 움츠러드는 법 없이 의욕적으로 파고든다.답을 찾는 그녀의 여정이 가급적 길어지길 희망한다. 한 배우의 나날이 깊어지는 연기력에 울고 웃으며 위로받는 날이 많아지도록. 윤소희 서로 모르는 사람이 만나 특별한 인연...
아침에 내가 먹은 밥은 1933년에 태어난 강호병 씨와 닿아있다. 자손 많은 집의 장손으로 자란 강호병 씨는 군 복무 중에 맞선으로 만난 고옥희 씨와 혼인했다. 스물다섯 살 새신랑은 열여섯 명이 사는 본가에서 하룻밤을 잔 뒤에 전방의 부대로 복귀했다. 밥 짓고 빨래하며 대식구 뒤치다꺼리할 새색시 곁에 사랑하는 마음만은 그대로 남겨둔 채 떠났다. 국방의 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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