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 어느 늦은 저녁, 기나긴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 통닭이 먹고 싶은데 좀 사다 줄 수 있어요?” 사랑하는 아내의 어렵지 않은 부탁임에도 나는 흔쾌히 대답할 수 없었다. 운영하고 있던 회사의 사정이 좋지 않았던 시기라 주머니 형편이 여의찮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그 말을 꺼냈을지 생각하니...
결혼 4년 만에 새 생명이 찾아왔다. 난임으로 고생하다 시험관으로 어렵사리 갖게 된 아이였기에 더욱 감격스러웠다. 하지만 안정기에 접어드는 12주까지는 조심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임신의 기쁨보다 불안감이 더 컸던 것도 사실이다. 집 밖은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 ‘집순이’를 고수하던 몇 주가 지나 드디어 안정기에 접어들어 외출을 감행했다. 친구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리...
얼마 전, 나의 형편없는 요리 실력이 유난히 원망스러웠던 일이 있었다. 연휴 첫날 아침에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아버지가 독감에 걸려서 많이 아프셔. 엄마가 잠깐 외출해야 하니까 네가 와서 아버지 점심 좀 차려드려. 어제 먹다 남은 죽 있으니까 데워드리기만 하면 돼. 소금은 아버지가 넣어 드시게 하고.” 아무리 요리를 못해도 죽 데우기 정도는 식은 죽 먹기일 듯...
내가 입원해 있는 여주세민정신병원에는 정신질환자, 장애인, 알코올의존자들이 모여 살아가고 있다. 알코올의존자로 병원에 들어온 나는 간호사와 보호사의 철저한 관리 아래 산책, 체조, 식사, 복약, 수면 시간 등을 정확히 지키며 바른 생활을 실천중이다. 조금 답답하긴 해도 규칙적인 생활에 익숙해지니 더 이상 괴롭지 않아서 좋다. 지난 설 연휴에는 5일간의 휴가를 받아 그리운 가...
요즘 한창 수영에 재미를 붙인 나는 식전 댓바람부터 집을 나선다. 나의 자전거, ‘진주’와 함께 미명(未明)의 새벽길을 달리노라면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한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품은 채 서서히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본다. 희망찬 기운에 들떠 신나게 페달을 밟으면 진주도 신이 나서 동그란 엉덩이를 귀엽게 흔들어 댄다. 나만의 자전거 드라이브가 즐겁다고 해서 ...
요즘 내 머릿속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클라이밍이다. 작년 가을, 소용돌이 속에 핀 한 송이의 꽃처럼 마음이 위태로울 때 날 굳건히 지탱해준 고마운 운동, 클라이밍. 현재도 내 하루하루를 든든하게 받쳐주는 이 운동의 매력에서 난 한동안 헤어나기 힘들 것 같다. 클라이밍을 처음 접한 건 홈트레이닝으로 20kg 정도 체중을 감량했을 무렵이었다. 목표 체중도 달성했겠다, ...
1년 전쯤, 지인들과 강원도 인제에 있는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다녀왔다. 여유로운 숲길을 예상 했는데 생각보다 올라가는 길이 험난했다. 그래도 마음 맞는 일행들과 함께 서로 의지하며 걷자 한결 수월했다. 한참 걷던 중, 낯선 물체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느린 우체통이라는 이름의 수상한 우체통이었다. 여기에 편지를 적어 넣으면 수신인이 1년 뒤에 받아본다니, 신기해서 그냥 지...
내가 다니는 목공소에서는 인근 한식뷔페 식당과 계약을 맺고 직원들이 단체로 식사를 하고 있다. 반찬들이 정갈하고 종류도 다양해 매일 맛있게 점심을 해결한다. 얼마 전에는 점심 메뉴로 느타리버섯 요리가 나왔다. 짙은 회색빛에 맨드라미 꽃잎을 닮은 느타리버섯이 제법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식당 사장님 말로는 미루나무에서 채취한 버섯이라고 했다. “지인이 미루나무에 느타리버섯을 키...
오래되고 허름한 아파트만 월세로 전전하다 이 집으로 이사한 지도 10년이 흘렀다. 긴 고생 끝에 마침내 새집으로 이사 온 날, 정말 꿈만 같아서 구름 위를 나는 기분으로 집안 구석구석 청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반짝반짝 윤이 나던 이 집에도 어느새 시간의 더께가 내려앉았다. 손때 묻은 나무 책상이 자리한 거실엔 미술 작업을 하고 남은 빈 상자와 빈 병이 가득하다. 깨끗하진 ...
나는 원래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고양이나 강아지가 예쁘다는 친구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었고, 특히 고양이는 눈매가 매서워 피해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모시고 사는 시어머니가 적적하시지 않게 반려동물을 키워보라며, 친한 이웃 아주머니께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데리고 왔다. 가까이서 봐도 귀여운 구석은 모르겠고 성가시기만 했다. 키우는 게 내키지 않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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