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핏하면 감동하는, 이른바 ‘감동조절장애’를 지닌 나는 운전을 하다가도 쉽게 울컥해지곤 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앞차가 나를 위해 비상등을 켜줄 때다. 내가 보지 못하는 전방에 비상 상황이 생겨 위험하니 감속하라고 알려주는 그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본인이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다 해도 파도타기 하듯 차례차례 비상등을 켜는 차들을 보면 마음이 뭉클해...
요새 1인 손님을 받는 식당이 많아진 추세가 ‘혼밥러’인 내게 참 반가운 일이다. 그 덕에 퇴근길에 혼자만의 조용한 식사를 자주 즐기고 있지만, ‘프로 혼밥러’라 자부하는 나도 삼겹살만큼은 아직 혼자 먹기 어색한 음식이다. 그럼에도 작년 겨울 가장 강한 한파가 찾아왔던 그날은 회사에서 힘든 하루를 보낸 터라 노릇노릇 익은 삼겹살 생각이 간절했다. 평소 퇴근길에 눈도장을 찍어...
늦은 오후, 추워 보이는 창밖을 보니 파근파근한 찐 고구마가 먹고 싶어졌다. 때마침 며칠 전 사다 놓은 고구마가 알맞게 숙성되었겠다 싶어 찜기에 고구마를 안쳤다. 10분 정도 지나자 김이 솔솔 올라오더니 이내 고소한 향기가 주방을 넘어 집 안 곳곳으로 퍼져나간다. 그 향을 따라 내 머릿속에서도 단상 하나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고구마뿐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감자도, 여름날 ...
월간《샘터》를 처음 만났을 적의 나는 굴러가는 돌멩이만 봐도 까르르 웃고,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 흘리던 10대 소녀였다. 감수성 풍부했던 내 곁에는 항상 《샘터》가 함께했고, 독자투고란에 내 사연이 실린 뒤 엽서를 보내준 친구와는 오랫동안 좋은 벗으로 지내기도 했다. 《샘터》와 함께 10대를 거쳐 20대를 보내던 어느 날, 고모가 혼처를 들이대셨다. 당시엔 스물일곱 살 처...
어느 날 아침 텔레비전을 켜니 한 시골 마을이 비췄다. 마을 앞에 강이 흐르고 멀리 들판에 흩어져 일하고 있는 농민들이 보였다. 아침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마을 정경이 한 점의 수묵화 같았다. 보이는 풍경이 어딘가 낯익어 자세히 보니 바로 내 고향 마을이었다. 충청북도 옥천(沃川)은 지명이 가진 의미처럼 물이 맑고 땅이 비옥한 지역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읍(邑)에서 30...
친정 엄마는 긴 세월 아프셨다. 척추뼈 골절과 당뇨로 1년에 몇 차례씩 병원에 입원하셨다. 난 살아 계시는 것만으로 감사하며 엄마를 보살폈지만 요양 병원에서 지내시던 몇 년은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을 실감했다. 매달 600만 원의 병원비를 부담하는 것이 너무 버겁던 시절이었다. 눈앞이 캄캄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무슨 일이든 해보자’라고 작정했을 때 아파트 게...
‘베테랑’의 사전적 의미는 ‘한 분야에서 오랫동안 일해 그에 관한 지식이나 기능이 뛰어난 사람’ 이다. 지식이나 기능뿐 아니라 인품까지 훌륭한 사람이 베테랑이라는 걸 얼마 전 출장길에서 여실히 깨달았다. 내가 근무 중인 전북 정읍교도소에서 국립산림치유원이 있는 경북 예천으로 출장을 가는 길이었다. 공사 구간이 많아 예상보다 한 시간이나 늦게 풍기 톨게이트에 도착한 터라 조급...
남이 처한 곤경을 외면해서 생긴 사건이나 흉악 범죄에 관한 기사를 접할 때마다 기분이 씁쓸해지는 요즘이다. 이렇게 인정이 메말라가는 사회에서 나는 물론이고 가족과 친구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걱정스럽다. 비관적인 미래만 그려지던 차에 얼마 전 지하철에서 잊지 못할 광경을 목격했다. 한낮에 어떤 젊은 엄마가 유모차를 밀고 객차로 들어왔다. 처음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
나는 익숙함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다니던 길로만 오가고, 만나는 사람만 만나며, 먹던 음식과 듣던 음악만 즐겼다. 단조롭긴 해도 안정적인 생활에 만족하며 지냈다. 이런 내 일상이 변하기 시작한 건 2년 전 봄이었다. 학급 반장 선거를 나갈지 말지 고민하는 아이에게 조언을 해주었는데 도리어 그 말이 죽비가 되어 내 마음을 때렸다. “그냥 나가보는 거야. 떨어져도 좋은 경험이...
지난여름, 군단 작계 지형 정찰을 위한 5박 6일 동안의 행군 훈련을 실시했다. 지금까지 살면서 이토록 오래 걸은 적이 없었기에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설렘 반 두려움 반으로 호기롭게 출발하기는 했으나 고비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한두 시간쯤 걸었을까. 눈앞에 펼쳐진 언덕길에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가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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