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으로 나가는 관문’으로 불리는 GOP 전초에서 2년간 지휘관으로 중책을 맡게 된 것은 내 삶의 가장 큰 영광이었다. 조국 수호의 첨병에서 지휘관으로서의 여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우들과 어렵고 힘든 순간을 함께한 추억들을 떠올릴 때면 보람과 행복이 한가득 밀려온다. 재임 기간 중 제일 기억에 남은 일은 늦은 봄, DMZ 비무장지대에서 일어난...
한국에서도 호불호가 적은 일본 음식 중 하나인 라멘. 내가 거주하는 후쿠오카는 ‘돈코츠 라멘’의 발상지인 데다 라멘에 대한 지역민들의 자부심이 대단한 도시다. 이곳의 돈코츠는 오랜 시간 뼈를 고아 돼지 본연의 누린내를 강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외국인들에게는 문화충격을 안기는 악취이지만, 현지인들은 더욱 짙은 누린내를 찾아 노포로 향하기도 한다. 나...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리는 7월의 아침이다. 커피를 좋아하는 나는 오늘도 커피머신 버튼을 누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한다. 원두 가는 소리와 함께 집안에 가득 퍼지는 커피 향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확행’이다. 내가 이렇게 커피로 행복감을 느낄 때마다 오래전에 졸업한 제자, 윤아가 떠오른다. 우리학과 여학생이었던 윤아는 장애가 있어 전동휠체어를 타는 학...
시골에서 억척스레 농사를 지으며 자식들을 뒷바라지해온 어머니는 일흔두 살이 되도록 취미 하나 없이 바쁘게 사셨다. 자식들이 커서 출가한 후에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오로지 농사만 지으셨다. 이제 그만 힘든 농사일 접고 복지관이나 문화센터에서 무어라도 배워보시라고 권유해도 어머니는 묵묵부답이었다. 말로만 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나는 마침내 행동으로 옮겼다. 집 ...
그날은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전철을 타고 가던 중이었다. 출입문 앞에서 기타를 메고 웅크린 채 앉아 있는 한 여학생이 신경 쓰였다. ‘어디 아픈가?’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양보해주신 자리에 앉아서도 소녀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도 이상하다고 느낀 듯했지만 모두 눈치만 보는 상황이었다. 소녀가 너무 힘들어하기에 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나랑 사랑 대회 담당자시죠?” ROTC 홍보문화부 소속 장교로 복무하며 글쓰기와 사생 공모전 담당을 맡아 수상자들에게 상장과 기념품을 전달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던 무렵에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온 까칠한 목소리에 무언가가 잘못됐음을 직감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불길한 예감은 적중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상장을 받아왔는데 이...
서울 혜화동은 나의 찬란하고도 애틋했던 옛사랑의 추억이 새겨진 동네다. 세월이 지나 이젠 빛바랜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를 떠올릴 때마다 여전히 가슴 한편이 쓰라리다. 그와 처음 만난 자리는 대학 합격 발표 후 아는 오빠의 주선으로 나간 소개팅이었다. 성균관대 앞 어느 찻집의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갔을 때 오빠와 나란히 앉아 있는 사람이 정면으로 보였다....
우리 외할머니로 말할 것 같으면 앙드레 김도 울고 갈 디자인 열정을 자랑하시는 분이다. 엄마의 웨딩드레스를 베라 왕 못지않은 솜씨로 손수 만들어 입히셨으며, 직접 원단을 구하고 재봉해 백화점의 아동복보다 더 예쁘게 손녀들의 옷을 지었던 분이다. 당신의 옷까지 손수 만들어 입으셨던 멋쟁이 중의 멋쟁이다. 옷에 대한 할머니의 남다른 애정은 여행에서도 식는 법이 없...
얼음 동동 띄운 시원한 아메리카노 한 잔이 가장 당기는 순간은 운동을 마친 직후이다. 얼마 전에도 운동을 끝내고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카페에 들어갔다. 테이크아웃으로 한 잔 주문하자 미안하다는 듯 웃으며 건네는 종업원의 말은 약간 실망스러웠다. “손님, 지금 주문이 밀려 있어 그러는데 죄송하지만 20분 정도 기다려주시겠어요?” 차가...
나는 매일 밤 10시가 되면 나만의 작은 의식을 치른다. 좋아하는 하늘색 속옷과 민트색 수건, 체리가 그려진 잠옷을 반듯하게 개어 초록색 책상 의자에 쌓는 일이다. 그러고는 의자를 화장실 앞으로 옮긴다. 내가 샤워를 끝냈을 때를 위한 준비다. 어차피 금세 흩뜨릴 옷을 각 맞춰 공들여 개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결혼한 후로 나는 남편이 샤워하러 들어가면 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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