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사는 손자 손녀들이 놀러 오는 날이면 조용하던 시골집이 떠들썩해진다. 그중에서도 막내 봄이는 은퇴 후 한적한 시골에 정착한 우리 부부에게 천진하고 순수한 행동으로 많은 웃음을 안겨준다. 다섯 살 배기 봄이는 언니 오빠들과 놀면서도 항상 외할아버지의 활동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풀 한 포기, 들꽃 하나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손으로 만져보며 궁금한 건 ...
코로나 7차 확산이 날로 심각해지던 지난 11월, 여든을 바라보는 아내와 난 깊어가는 겨울 추위보다 바이러스가 더 걱정스러웠다. 백신 4차 접종까지 마치고 방역수칙도 철저히 지키며 생활하던 중, 우려하던 일에 맞닥뜨리고 말았다. “여보, 나 코로나 양성 판정이 나왔어.” 감기 기운이 있다며 어두운 표정으로 출근했던 아내가 결국 반갑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
4년 전 어느 토요일 저녁, 당직근무를 하는 중대장에게 전화가 왔다. 운전병으로 근무하는 대대원 동현이가 치통을 호소해 병원에 보내도 되냐는 용건이었다. 치료가 길어지진 않을지, 상태가 많이 좋지 않은지 대대원의 건강상태가 걱정되었다. 심란한 마음으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어 중대장에게 대대원의 상태부터 체크했다. 주말에 진통제만 처방 받았다기에 그날 오전에 ...
미국살이를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K-워킹맘’으로 사는 일상에도 이제 많이 익숙해졌다. 미국에서의 삶은 낯설기도 했지만 새로운 경험들을 할 수 있어서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 그중에서 내게 가장 두렵고 의미 있었던 도전은 바로 운전이다. 평생 잊지 못할 그 도전은 큰아이가 3개월에 걸친 긴 여름방학에 들어가던 날로부터 계획되었다. 당시 나는 1년간의 학위 과정을 마...
거리마다 연말의 들뜬 분위기가 넘실대던 지난 12월 어느 토요일 밤, 동창회에 갔다가 귀가하면서 아찔한 경험을 했다. 매일 타는 113번 버스에 그만 장갑 한 짝을 두고 내린 것이었다. 집사람이 일주일 전에 선물로 사준 장갑이라 아쉬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짝 잃은 기러기처럼 홀로 남겨진 장갑 한 짝이 눈에 밟혀 주말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아무래도 아내의 소중한 선물을...
“아빠, 방울토마토에 꽃이 피었어요!” 최강 한파가 찾아온 지난 12월 저녁, 칼바람을 뚫고 퇴근해 집에 오니 아이가 현관까지 달려와 안기며 큰 목소리로 말했다. ‘한 겨울에 무슨 꽃이 폈다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 방으로 들어갔는데 정말 노란 꽃 다섯 송이가 수줍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막내아이가 지난 4월, 식물의 성장과정을 관찰해 기록하는 숙제가 있다며 ...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피천득 선생님의 말씀대로 인연의 깊이는 함께한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 신비한 속성을 지녔다. 하루였지만 깊은 위로가 돼준 그녀를 다시 만날 날이 올까? 그녀를 처음 만난 곳은 템플스테이를 위해 찾았던 충남 공주에 있는 절 ‘갑사’였다. 나처럼 동행자 없이 혼자 온 ...
내가 일과를 시작하는 풍경은 일본소설 《우동 한 그릇》 속 장면과 닮았다. 우동가게에서 우동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엄마와 두 아이가 환하게 짓는 미소. 매일 회사에 출근해 따듯한 국밥 한 그릇을 앞에 둔 내 표정이 꼭 그렇다. “좋은 아침이에요! 건더기 많은 것이 좋으시죠?” 구내식당 조리사님의 활기찬 인사가 아침마다 나를 반긴다. 고맙다고 답하면 온돌방 아랫목처럼 뜨끈...
어릴 적에 살았던 고향, 충남 칠갑산 자락의 작은 동네에서는 김치가 귀한 음식이었다. 비싸고 구하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그해 김장으로 담근 김치로 겨울 식량의 절반을 해결했으니 김장철만 되면 “김장 하셨슈?”가 동네 어른들끼리의 인사였다. 우리 집을 비롯해 이웃집들은 김장할 배추가 필요하면 직접 농사를 지었다. 아침저녁으로 개울에서 물을 길어다 밭에 뿌리고 잡초를 뽑고 해...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모임이 있다며 외출 준비 중이었다.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있는 날이 많던 아내의 외출 준비가 반가워 나는 현관 앞까지 나가 “내 걱정 말고 친구랑 실컷 수다 떨고 와!” 하고 배웅을 했다. 곧 저녁 때가 되어 배달음식을 시켜먹을지, 라면을 끓여 먹을지 잠깐 고민하다가 끼니를 대충 때운 것을 알면 아내가 속상해 할 것 같아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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