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떠올리기만 해도 갓 지은 쌀밥을 입에 넣은 것처럼 마음 든든해지는 얼굴이 있을까? 그런 따끈한 밥 같은 사람이 내겐 한 명 있다. 대학 졸업 후 IMF 여파로 취업이 어려워져 도서관에서 취업공부를 하던 시절에 힘이 되어준 선오 선배. 졸업 1년 만에 경찰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형은 이후에도 종종 도서관에 들러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취직시험을 보기 전에는 긴장하지 ...
지금으로부터 2년 전, 나는 작은 소망 한 가지를 품고 있었다.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 엄마의 뱃속처럼 편안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었다. 차가운 철제 침대 대신 따스하고 아늑한 우리 집에서의 분만을 고집했던 것은 그래서였다. 하지만 의사선생님은 “초음파로 보면 아기 머리가 커서 자연주의 출산은 무리예요. 머리 크기는 보통 유전이어서 줄어들 가능성이 낮거든요”라는 말로 나를 만...
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살다 돌아보니 2022년 달력도 딱 한 장 남았다. 그동안 쪽파 다듬을 때, 마늘 깔 때, 손톱 깎을 때나 요긴하게 쓸 줄 알았지, 나의 각오를 돌아보는 매개체로 삼지 못한 한 해였던 것 같아 달력을 보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한 장 한 장 달력을 뜯을 때마다 이번 달은 새로운 시간을 보내리라 각오를 다졌지만 다짐은 그때뿐, 이어지는 일상은 전과 다름없...
10년간 일본에서 유학생으로 지냈던 내게 현역 입대는 남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주변에 현역으로 군 복무를 마친 사람도 많지 않았거니와 평소 전문 연구요원이라는 대체 복무의 길만 계획했기 때문에 나와 상관없는 일로 여겼었다. 하지만 역시나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인지 석사과정을 마친 후 박사과정까지 학업이 이어졌고, 이후 생각처럼 나와주지 않는 연구 성과와 가족과의 ...
1960~1970년대만 해도 ‘나를 위한 삶’이란 자신보다 타인에게 초점이 맞춰진 삶을 의미했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삶,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삶, 배우자를 섬기는 삶…. 나 역시 헌신과 봉사를 우선순위로 두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배우며 자란 세대이다. 보릿고개 시절에는 누구나 그러했듯 나도 넉넉한 살림살이를 갖추지 못했다. 시어머니를 모시며 중등교사인 남편의 박봉으로...
집안 형편으로 몇 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다 꿈을 놓을 수 없어 결국 사표를 내고 중등 임용시험에 도전하게 되었다. 내가 돈을 벌어 한결 생활이 나아졌다며 고마워하시던 어머니에겐 죄송했지만 1, 2년만 고생하면 더 나은 길이 열릴 거라 말씀드렸다. 그 마음의 짐을 퇴직금에서 학원비와 최소한의 용돈을 빼고 모두 어머니에게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다 보니 공부하는 내내 허리띠를 졸라...
무색무취의 공기처럼 일상엔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들이 있다. 엘리베이터나 아파트 계단, 지하철 역사처럼 목적지가 되지 못하는 곳들을 난 매일 무심히 지나쳐간다. 콘크리트 바닥처럼 밋밋한 공간이 할아버지를 만난 특별한 장소가 된 것은 뜻밖의 일 때문이었다. 서울 강변역 2호선 내선순환승강장. 외근을 나가는 길에 생수를 사려고 매점에 들른 날이었다. 가판대가 있는 작은 매...
책장을 정리하다가 연두색 쪽지가 눈에 띄었다. 넥타이 모양으로 접힌 선이 아주 반듯해 종이를 펼치는 내 손길도 덩달아 조심스러워졌다. 고등학생이던 딸이 써준 편지를 10년 만에 다시 읽어 내려가며 그때처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남편과 내가 학원을 운영하던 당시, 남편의 다리가 빨갛게 부어올라 찾은 병원에서 심하면 패혈증으로 번질 수 있다는 ‘봉와직염’ 진단을...
지병으로 오래 투병생활을 하던 아내가 4년 전, 결국 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를 허망하게 떠나보낸 후 난 매일 밤 지독한 불면에 시달렸다. 파삭하게 말라가는 내가 걱정되었는지 어느 날 아들이 근교로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며 손을 이끌었다. 기운이 하나도 없었지만 아들의 끈질긴 권유에 못 이겨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따라나섰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익숙한 장소였다. 우리...
카페에서 내가 즐겨 찾는 메뉴는 연한 아메리카노다. 커피 특유의 쓴 맛이 옅은 한 모금의 액체가 입안을 부드럽게 감돌 때마다 옛 사랑의 기억이 이젠 제법 편안하게 떠오른다. 봄 햇살 같은 미소를 자주 짓던 그는 첫 만남부터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었다. 대화 중 잠시 흐르는 정적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함께 있는 시간이 참 편했다. 내 말에 장단 맞추며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