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밤 꽃잎을 오므렸던 나팔꽃이 새벽녘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활짝 피어오른다. 그 모든 게 치열하게 새아침의 영광을 준비한 덕분이리라! 인고의 시간을 견디고 난 뒤 더 아름다워지는 것이 비단 나팔꽃뿐일까. 어쩌면 우리도 힘든 시간을 견딘 후에 더 찬란하게 피어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결혼 후 20년 넘게 전업주부로 살던 나 역시 그 무렵, 갱년기가 찾아와 극심한 ...
두 아이를 키우는 나는 바쁜 저녁시간을 쪼개어 필라테스를 다니고 있다. 얼마 전이었다. 수업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급하게 전화를 걸어온 남편이 둘째 아이 발가락에서 피가 나고 퉁퉁 부어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당장 내가 달려가는 게 맞지만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 수업이 이미 시작되어 취소가 불가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이날 운동을 취소하면 수업...
아홉 살 무렵, 전학을 간 학교에서 호랑이 선생님을 만났다. 전학 첫날, 유난히 피부가 새까만 나를 신기하듯 쳐다보는 친구들의 눈도 무서웠지만, 바짝 얼어있는 나를 신경도 쓰지 않는 선생님의 무심한 태도가 내내 야속하기만 했다. 선생님은 전학생에게 아예 관심도 없는 듯했다. 당장 제대로 된 수업시간표조차 알려주지 않아 며칠 동안 수업 준비도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었다. 선...
수련회에 간 딸아이가 집을 나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급하게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스마트폰 충전기를 못 챙겼어. 어떡해?” 당황해하는 아이를 다독여 놓고 전화를 끊고 나자 잊고 있던 옛 기억이 아릿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딸아이가 아기였던 십수 년 전의 일이다. 그날도 친정에 다녀와 아기 씻기랴, 청소하랴 정신없는 와중에 친정아버지의 전화가 걸려왔다. 딸아이처럼, 친정...
아침 5시 30분. 정훈장교인 나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오늘 언론에서는 어떤 군 관련 기사들을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고 스크랩하면서 하루를 시작한다. 한 시간 가량 각종 기사들을 보고 정리를 마치면 그다음은 14살, 12살 두 아들을 위한 아침식사를 준비한다. 오늘 아침메뉴는 된장국. 물을 담은 냄비에 코인 육수 두 알을 넣은 뒤 양파, 감자, 두부를 숭덩숭덩 썰고 된...
10여 년 전부터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나는 최근 야간 근무가 많아지면서 집안 살림을 제대로 돌보질 못했다. 밤낮이 바뀌다 보니 낮엔 주로 잠을 자야 해 언제부턴가 냉장고를 열면 한두 개씩은 꼭 날짜 지난 식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남편의 잔소리도 점점 심해졌다. 더는 방치하면 안 되겠다 싶어 얼마 전 집안 곳곳을 대청소했다. 청소는 매일 해도 티가 안 난다지만 주...
오래전 남자 친구에게 육군 장교로 지원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당시엔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다른 길도 있는데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군 장교로 복무하겠다는 결정이 정말 의외였다. 군에 입대한 그는 걱정과는 달리 그곳 생활에 잘 적응하는 듯했다. 그래서일까. 주말에도, 공휴일에도 면회 오라는 연락 한 번이 없었다. 면회는커녕 내 편지에 답장조차 하지 않는 그에게 서운함이 쌓여갔다. ...
5년 전 봄, 나에게는 세상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딸이 태어났다. 아이는 자가호흡이 불가능한 채로 태어나 숨 막히는 세상부터 마주해야 했다. 급히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원하여 엄마 젖가슴의 따뜻함 한 번 느껴보지 못한 채 1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신생아 중환자실에 누워 매일매일 생사의 경계에서 싸워야 했다. 다행히도 초보 엄마, 아빠의 간절함 덕...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꼽으라면 2020년 10월 10일이다. 숫자 ‘0’이 번갈아 들어가는 이 특이한 날짜는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날, 바로 내 결혼식 날이다. 약 1년 정도 결혼 준비로 정신없는 날을 보내면서도 나는 삶에서 가장 아름답고 기쁠 결혼식 생각에 내내 맘이 설렜다. 하지만 결혼식을 치를 2020년 시작과 동시에 맞닥뜨린 것은 코로나19라는 무시...
“앞으로 나란히!” 봄바람에 운동장 모래가 아지랑이처럼 일던 날,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전교생이 보폭을 맞추고 있을 때 내 등에 누군가의 손끝이 닿아 슬쩍 고개를 돌리니 단발머리 중학생이 씩 미소를 짓고 있었다. 2교시 쉬는 시간에 또 누군가가 내 등을 꾹 누르기에 돌아봤더니 그 애가 이번엔 “네 필통 예쁘다” 하고 말을 걸었다. “어? 고, 고마워.” 낯가림이 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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