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1살이던 80년대 중반, 집안 형편이 어려워진 우리 가족은 외양간을 고쳐 만든 충북 옥천의 어느 허름한 셋방에서 2년여를 살았다. 나무문으로 만들어진 쪽방 중 제일 왼쪽 두 칸을 사용하던 우리 옆방에도 많은 사람들이 세를 살다 갔다. 어느 날 6살짜리 남자아이와 엄마아빠, 이렇게 단출한 세 가족이 이사를 왔다. 아이의 부모님은 첫눈에도 연세가 많아 보이는 분...
“안녕, 미요! 잘 잤어?” 나는 우리 집 앞마당에 사는 고양이 ‘미요’에게 건네는 아침인사로 오늘 하루도 기분 좋게 시작한다. 미요와 새끼고양이 노랑이도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안부 인사를 건넨다. 이젠 눈이 마주칠 때마다 후다닥 도망가는 섭섭한 행동은 하지 않지만 아직 곁을 주진 않는 게 조금 아쉽다. 가까이 다가와 발치에 앉아준다면 손으로 쓰다듬으면서 사랑을 ...
기온이 34℃까지 치솟았던 얼마 전 여름날이었다. 다이어트를 한답시고 지하철역에서 자취방까지 3㎞를 걷다가 갈증을 이기지 못하고 들어간 집 앞 편의점에는 키가 작고 마르신 아주머니가 카운터를 보고 계셨다. 엄마랑 많이 닮아서 눈길이 갔던 아주머니가 계산해준 물병을 열어 벌컥벌컥 마신 뒤 집까지 다시 땀을 뻘뻘 흘리며 걸어왔다. 도착하자마자 에어컨부터 틀고 샤워하고 나...
2년 동안의 계약직 근무가 끝이 났다. 정규직만 바라보면서 열심히 일했건만 정규직 전환은 되지 않았고 “수고하셨습니다”라는 한마디를 끝으로 회사라는 울타리에서 쫓겨나 사회라는 경쟁 속에 다시 던져진 것이다. 당시에는 갑작스러운 퇴사로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 며칠이 지나니 실감이 났다. 막연한 불안감과 번아웃이 몰려왔다. 그러다 우연히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연애, 취업 무엇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 주인공이 고향인 시골로 내려와 지내는 이야기로 어쩌면 그때 당시 내 상황과 맞물려 더 공감이 갔다. 그렇게 나는 내 인생 처음으로 혼자 영화 촬영지인 경북 군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하지만 정말 영화는 영화일 뿐인 건가? 아기자기할 거라고 생각한 시골마을은 생각보다 컸고 영화 속 장소들은 각각 어...
꽃 같은 아들을 먼저 먼 여행 보낸 뒤 나의 취미는 자전거 타기가 되었다. 마음이 답답할 때 페달을 밟고 콧노래를 부르며 달리다 보면 속이 뻥 뚫려 오뉴월 땡볕이 뜨거운 날에도 어김없이 자전거를 끌고 나갔다. 평소 같으면 자전거 마니아들이 가득했을 자전거 도로지만 더위 때문인지 그날따라 나 혼자였다. 텅 빈 자전거길을 천천히 달리다 보니 저 멀리 몸에 태극기를 두른 ...
나는 27살 늦깎이의 나이로 입대했다. 꿈을 좇아 고군분투하느라 입대가 늦어진 거라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지만 전역할 때는 서른을 목전에 앞둔 나이가 된다는 사실이 불안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랑스러운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일이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맘을 편하게 먹기로 하고 입소를 했다. 큰 어려움 없이 훈련소를 수료하고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 나는 한 학교부대의 ...
직장생활이 어느덧 8년째에 접어들었다. 입사 후 설레던 출근길은 언제부턴가 한없이 지루한 시간이 되었다. 취미나 관심사 하나씩 갖고 있는 20대 후배들이 “선배는 뭐 좋아해요?” 라고 물을 때마다 답을 찾지 못하는 스스로가 참 실망스러웠다. 어쩌다 그 많던 취향을 모조리 잃고 살았을까? 매사에 긍정적이고 언제나 생기 넘치던 내가 그리워질 무렵, 혼자 제주도로 향했다. 일...
국제우편물이 왔다는 우체국 집배원의 메시지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해외배송을 시킨 적이 없는데 대체 누가 보낸 거지?’ 택배를 받고 발송인의 이름을 확인하고 나서야 궁금증이 풀렸다. 발신인은 놀랍게도 3년 전 일본여행을 준비하며 알게 된 준코 씨였다. 그 무렵 일본 홋카이도 아사히카와 여행을 앞두고 정보를 얻기 위해 SNS 검색을 하게 되었고 우연히 준코 씨의 ...
한여름 뙤약볕과 콸콸 흐르던 계곡물 소리가 잦아든 요즘, 텃밭에서 열매들이 둥글둥글 익어간다. 보름달 같은 호박덩이가 풀을 깔고 점잖게 졸고 앉았고 가지는 짙은 자줏빛으로 길고 동그란 얼굴을 단장하는 중이다. 초가을 햇빛을 모조리 끌어당긴 듯 황금오이 하나 하나가 눈이 부시다. 아직은 따가운 한낮의 열기에 지친 듯 낮잠에 늘어졌지만 햇빛과 비와 바람의 돌봄에 더해 남편의...
분홍빛의 사랑스러운 여름 과일, 복숭아. 새콤달콤한 복숭아를 맛볼 때마다 그 빛깔만큼이나 고운 추억이 떠오른다.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는 경기도 이천 장호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사셨다. 쌀은 기본이고 참외, 복숭아, 고추 등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시느라 할머니는 허리 펼 새가 없으셨다. 우리 가족은 여름방학마다 할머니 댁에 가서 일손을 거들었는데 난 시골집 방문이 질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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