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18개월 된 손녀를 돌보는 집사람을 도와 나도 가끔씩 육아보조를 하고 있다. 맞벌이하는 아들 부부를 돕기 위해 우리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명색이 교육자인 할아버지의 체면이 말이 아니다. 중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교육계에 오래 종사했음에도 교육과 육아는 전혀 다른 분야라는 걸 손녀를 돌보며 알게 되었다. 육아의 ‘ㅇ’자도 모르는 할아버지의 무지를 드러낸 게...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가장 그리워지는 친구가 있다. 시골집에서 같이 동고동락하며 지내던 ‘누렁이’라는 소다. 여름철이 되면 나는 강변이나 야산으로 꼭 누렁이를 몰고 나갔다. 돌아다니며 풀을 실컷 뜯어먹도록 고삐를 뿔에 감아 묶어두고, 그 사이 나는 친구들과 가재도 잡고 오디도 따먹다가 시냇물에서 멱을 감고 놀았다. 배가 빵빵하도록 풀을 먹은 누렁이는 우리 옆으로 ...
훈련소에서 행군까지 무사히 마치고 2군단 본부근무대로 전입을 오게 된 나는 본청 인사 참모처에서 인사계원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하루하루 열심히 지내며 업무에 적응도 하고 어느 정도 부대 생활에 익숙해지자 주위 사람들에게 내 감정을 표현할 여유가 생겼다. 그즈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이 온나라 홈페이지에서 진행되고 있는 ‘감사일기 프로젝트’였다. 꾸준히 올리는 사람들이 몇몇...
연차가 높아질수록 회사에서 에너지가 점점 고갈돼 가는 기분이 든다. 꼰대 상사와 MZ세대 후배 사이에서 ‘낀대’가 되어 업무와 인간관계에 치이다보니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이 오르락내리락,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롤러코스터를 탄다. 어떨 땐 마치 고장 난 벽시계 마냥 삶의 동력이 멈춰버린 것 같다. 얼마 전, 혼자 백패킹을 떠난 이유도 정지된 삶의 태엽을 다시 감고 싶어서였다...
내가 사는 지역에는 고속도로 휴게소로 연결되는 쪽문이 하나 있다. 몇 년 전, 동네커뮤니티에서 휴게소 호두과자가 먹고 싶을 때마다 쪽문을 통해 휴게소에 다녀온다는 동네사람의 글을 읽자마자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 쪽문을 통해서라면 평소 내가 좋아하는 휴게소 우 동을 언제든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반 식당과는 달리 어딘가로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 틈에서 설레고 달뜬...
평소 공연이나 뮤지컬 등 문화생활을 너무나 좋아하는 나지만 결혼을 하고 나서는 좀처럼 여유가 생기지 않았다. 아이 낳고 유치원에 보내는 데 4년이 걸렸고, 뒤이은 코로나 사태까지 더해 결혼 후 7년 동안 공연은커녕 제대로 된 영화 한 편 못 보고 지냈다. 그러던 중 사회적 거리두기도 해제되고 평소 좋아하던 가수 성시경의 콘서트 소식이 들려왔다. 예매일이 다가왔지만 나로...
내 기억 속 엄마는 땀 혹은 물, 어쩌면 두 액체가 뒤섞인 것처럼 늘 축축이 젖어 있는 모습이었다. 엄마의 직업은 동네 목욕탕에서 손님들의 때를 밀어주는 세신사였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가 끝나면 집 대신 목욕탕부터 찾았다. 여탕 탈의실에 앉아 동생과 놀기도 하고 숙제도 하며, 엄마를 부를 일이 있으면 물방울 맺힌 창을 똑똑 두드렸다. 그러면 축축하게 젖은 속옷을 입은...
언제 찾아가도 기분이 좋아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장소를 ‘마음의 고향’이라 한다면 내겐 외갓집이 그런 곳이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빈 집으로 남은 충남 연산의 외갓집으로 얼마 전, 오랜만에 나들이를 다녀왔다. 마음속으로 “할머니, 할아버지 저 왔어요” 하고 인사를 건네며 마당에 들어서자 무성히 자라 있는 잡초가 나를 맞았다. 이름 모를 풀들은 그동안 너무 ...
외부 미팅이 있어 택시를 타고 여의도로 가는 길이었다. 목적지를 10여 분 앞둔 순간, 저 멀리 황금빛 63빌딩이 눈에 들어왔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고층 빌딩을 보자마자 내 기억은 어느새 28년 전 그날로 돌아갔다. 중학교 1학년 가을 소풍으로 방문했던 곳이 바로 63빌딩 수족관이었다. 그날은 유독 ‘처음’이었던 것이 많았다. 수도권에 살았지만 서울의 아파트를 포함해 그렇...
나는 길치에다 모험심이 강한 편도 아니다. 그렇다 보니 낯선 길이 두려워 늘 다니던 길로만 다니는 것이 마음 편하다. 집 근처를 산책할 때도 예외는 아니다. 남들은 지루하지 않게 여기저기 다니며 새로운 코스를 발견하는데 나는 항상 걷던 길로만 다니길 고집했다. 그런데 그날은 잠시 딴생각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늘 다니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한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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