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약 20여 년 전, 소대장으로서 나의 첫 부임지는 강원도 양구였다. 겨울에 춥고 눈 많이 오기로 유명한 곳이라 도시에서만 줄곧 생활하던 내가 혹독한 환경을 잘 버틸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첫 부임인 만큼 부대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운 마음이 컸다. ‘소대원들이 나를 잘 따라줄까?’ 신임 소대장으로서 소위 계급장을 달고 처음으로 소대원들을 통...
아이를 낳고 육아휴직을 쓰다가 오랜만에 복직해서 초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았다. 엄마가 되어 제자들을 마주하니 전과는 확실히 차이가 느껴졌다. 전부 내 아이 같았고 이해의 폭이 좀 더 넓어졌달까? 새내기 교사는 아니지만, 처음 교사를 시작했을 때처럼 설렘과 열정으로 아이들을 대했다.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궁금할 부모님의 마음도 헤아려져 학급 밴드를 만들어 아이들의 수업 모습...
결혼 9년 차에 접어든 나와 남편에게는 오래된 소원이 한 가지 있다. 우리를 닮은 예쁜 아기를 갖는 것이다. 결혼한 지 2년이 지나 병원에서 기어이 ‘난임’이란 단어를 듣고 말았을 때는 괴로움이 컸다. 두 차례의 인공수정에 실패해 시험관 시술을 시도하는 사이 절망감이 깊어졌다. 고통스런 과정이었지만 아이를 만날 수만 있다면 더 힘든 시간을 견뎌내야 한대도 괜찮았다. ...
언제나 건강하기만 할 것 같았던 아들이 수술을 받은 것은 지난 3월이었다. 2년 전에 축구를 하다 다쳐 십자인대 수술을 받은 적 있는데 무릎 통증이 재발한 탓이었다. 수술은 무사히 끝났지만 하반신 마취가 덜 풀려 이튿날 퇴원할 때까지 거동이 불편했다. 큰 수술은 아니었어도 건장한 아들이 잘 걷지를 못하니 무척 속상했다. 병원에서 아들이 지내는 원룸에 가기 위해서는 버스...
지난해 겨울, 돌아가신 엄마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상자에 가득 든 엄마의 일기장을 발견했다. 엄마는 하루의 일과를 노트에 적는 것을 좋아했다. 엄마의 취미가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라 노트며 볼펜을 자주 사다 드렸는데 그 노트가 모두 일기장이 되어 상자 안에 들어있었다. 집으로 모두 가지고 오긴 했어도 일기를 열어볼 엄두는 도무지 나지 않았다. 그 안의 내용을 읽으면 얼마...
사무실의 차광막을 뚫고 목덜미를 공격하는 햇볕이 한층 따가워졌다. 여름이 코앞까지 다가왔으니 이제 곧 우렁찬 매미소리가 귀를 따갑게 파고들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정겹기만했 던 매미소리가 지금은 한낮의 지루함만 더할 뿐이다. 매미소리가 들려오면 현실을 벗어나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하지만 현실은 해야 할 일들에 발이 묶인 신세. 원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대...
라일락 향기와 함께 늦봄이 가고 있다. 라일락 꽃잎은 퇴색해가지만 몽이와의 추억은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 사랑의 시작’인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몽이는 내게 첫사랑처럼 달콤하고도 쓰라린 기억을 되새겨주는 꽃으로 남아 있다. 어느 봄날, 반려견 몽이를 데리고 동네를 산책하던 길이었다. 어디선가 풍겨온 향내가 발길을 붙잡았다. 향기를 찾아 고개...
어릴 적부터 어머니는 항상 일로 바쁘셨다. 그래서 나는 밥을 거의 혼자 먹었다. 평소에는 크게 문제 될 것 없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 소풍을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달라졌다. 소풍 가서 먹을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나에겐 퍽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일하느라 항상 바쁘시던 어머니는 김밥 한 줄 만들어줄 여유조차 없으셨다. 엄마의 김밥 대신 나는 ...
주말 아침마다 그는 항상 똑같은 자리에 앉았다. E열 9번. 곱게 빗은 성성한 백발과 깔끔한 양복 차림으로 매주 영화관을 찾는 그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중절모를 옆자리에 단정히 벗어두고 아름다운 꽃에라도 홀린 듯 스크린을 바라보던 그를 처음부터 의식했던 건 아니었다. 빈 객석이 대부분인 교내 영화관에서 어느 순간 그와 내가 유일한 교집함임을 깨달은 후부터였다. 입시라는...
내가 다녔던 대학교는 입학할 때부터 쓸쓸함이 감도는 곳이었다. 신입생 수가 고작 400여 명인 신생학교여서 시골의 휑한 부지에 부는 차디찬 산바람이 마치 ‘너희는 허허벌판에 내던졌어’라고 비웃는 듯했다. 하지만 형이 있었기에 대학생활이 그리 외롭지만은 않았다. 타인에게 도통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사람이었던 형과 가까워진 계기는 동아리 활동이였다. 삼수를 해서 나보다 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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