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주말, 아침 일찍 서울을 떠나 나 홀로 양평에 있는 구둔역을 찾았다. 그곳은 몇 년 전 양수역과 지평역 등 9개 코레일 역을 관리하는 양평관리역장으로 재직했던 나에겐 꽤나 의미 있는 추억의 장소였다. 구둔역은 1940년 4월 보통역으로 영업을 시작해서 2012년 중앙선 복선전철화 사업으로 폐역이 되며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비록 지금은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아직...
재작년 연말, 코로나 때문에 피트니스센터에 다니는 게 찜찜해 운동을 중단한 뒤로 배가 더 나왔다. 추위 때문에 몇 겹씩 옷을 겹쳐 입게 되자 바지허리가 점점 꽉 껴오는 게 적나라하게 느껴져 출근길 기분이 엉망이었다. 사실 나는 키에 비해 과체중에 가족력이 있는 당뇨 고위험 환자라 살찌는 걸 피해야 하는 입장이다. 정기검진 때 당장 고혈압 진단을 받아도 이상할 게 없는 ...
지난여름, 아빠가 달맞이꽃 한 송이를 꺾어 오셨다. 작은 연둣빛 잎사귀에 앙증맞게 달린 노란 꽃잎들이 참 예뻤다. 빈 사과주스 병에 물을 채워 꽂아 놓으니 여름 창가에 꼭 맞춘 듯 잘 어울렸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하룻밤이 지나고 꽃을 보니 샛노랗던 꽃잎들이 시들고 말라 거무튀튀 하게 변해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버리고 말았겠지만 어제의 기쁨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쉬워 치...
요즘 나는 흑임자라떼에 푹 빠져 있다. 검은 깨의 고소한 향이 쌉싸름한 커피의 맛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풍미가 기분까지 좋게 바꿔놓는다. 흑임자라떼와 사랑에 빠진 건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여름, 대학 친구 두 명과 강릉여행을 갔을 때다. 폭우가 쏟아지는 평일이었는데도 흑임자라떼로 유명한 그 카페는 워낙 ‘핫플’인데다 자리도 협소해 1시간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엄마가 돌아가신 지 벌써 6년 반이 다 되어간다. 그런데도 엄마는 해마다 크리스마스 즈음 이면 하늘나라에서 내게 용돈을 보내주신다. 크리스마스 날 아침,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이 놓여 있을까 기대하며 트리 앞으로 다가가는 어린아이처럼 올해도 난 12월 25일에 두근대는 마음으로 은행 계좌를 확인해보았다. 올해도 어김없이 엄마는 빨간 양말 속에 봉투를 넣어 주는 산타가 되...
6개월 차 신혼부부인 나는 여가시간이 주어지면 조용한 집안에서 화분을 돌보며 보내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데 얼마 전 어디선가 집안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엔 아이 울음소리인 줄 알았지만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아무래도 동물 소리인 것 같았다. 그날 이후 매일 들려오는 정체 모를 그 울음소리가 계속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평화로운 일상을 흔드는 범인을 찾은 것은 얼마...
남편의 발령으로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전세살이이긴 했지만 10년 동안 살며 정이 들었던 집을 떠나려니 시원섭섭했다. 이 집에서 참 추억이 많았다.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태어났고, 철부지였던 우리 부부가 책임과 의무를 배우며 부모로서 거듭나게 한 집이다. 집안 곳곳에도 우리 가족의 흔적이 가득했다. 첫 아이가 식탁 다리를 잡고 서서 처음 걸음마를 했던 날, 온...
며칠 전 지갑을 잃어버렸다. 패딩 주머니에 지갑을 찔러 넣고 동네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에 흘린 모양이었다. 다행히 현금은 얼마 들어있지 않았지만 카드며 신분증을 재발급 받을 일이 귀찮기만 했다. 무엇보다 며칠 전 생일선물로 남자친구에게 받은 지갑이라 아쉬움이 더 컸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부랴부랴 동선을 되짚으며 샅샅이 뒤져봐도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하...
우리 집 식탁 옆 벽에는 고흐의 구두 한 켤레라는 그림이 걸려있다. 황토를 연상시키는 노란색 배경에 막 집에 들어온 주인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듯한 낡은 검정가죽 구두 한 켤레가 눈길을 끄는 작품이다. 그림을 그릴 당시 고흐는 동생 테오가 살던 파리에 머물고 있었고, 갑자기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한 동생 때문에 상심에 빠져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날도 생활고에 시달리던 고흐는 간신히 그림 몇 점을 팔아 집으로 돌아...
올해 초, 서로 마주앉은 친구와 나의 분위기는 조금 침울했다. “우리 2021년에는 특별히 조심해야 돼. 아홉수야, 아홉수.” 나쁜 시기를 피하려고 혼인신고까지 예정보다 한 달 앞당겨 했다는 친구의 한숨 섞인 말을 난 쿨하게 받아쳤다. “뭘 그런 걸 신경 써.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아홉수였는데 지금까지 베프로 잘 지내고 있잖아!” 난 부모님의 영향 때문인지 아홉수나 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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