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해 전, 생일 아침에 딸이 선물 하나를 내밀었다. 부피가 제법 크기에 “뭐, 이런 걸 샀어? 돈 아껴 쓰라니까…”라고 말하니 딸아이가 “오빠랑 같이 산거야. 조금 비싸긴 해도 엄마한테 꼭 필요한 거니까 돈 썼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 마”라며 입을 막았다. 캄보디아 해외봉사를 마치고 귀국할 때 슬리퍼를 신고 돌아온 엄마를 보면서 이번 생일에는 꼭 운동화를 선물해야지 생각했다...
경북 상주시니어클럽에 ‘노노케어’라는 노인일자리 사업 담당자로 입사한 지 두 달이 넘어간다. 업무에 어느정도 익숙해졌지만 어렵사리 얻은 직장인만큼 열심히 일해야겠다는 초심은 150여 명의 어르신들을 관리해야 하는 업무 앞에서 번번이 흔들린다. 종일 걸려오는 전화에 시달리고 끝없이 밀려드는 서류들을 눈 빠지게 검토하다보면 ‘이 직장을 계속 다녀야 하나’라는 회의감에 젖어든다....
“사돈, 여기 고사리 많아요. 얼른 오세요!” “어디 계세요 사돈? 내가 있는 곳도 많아요.” 매년 4월만 되면 친정엄마와 시어머니 두 분이 서로를 애타게 찾는 소리가 제주의 들판 위로 낭랑히 울려 퍼진다. 여름을 재촉하는 ‘고사리 장마’가 끝나는 시기가 우리 ‘사돈 팀’의 본격적인 활동 시기! 친정엄마는 가시덤불을 헤쳐야만 만날 수 있는 흑고사리를 꺾느라 숲 깊숙이 들어가...
새내기 주부인 나는 마트에 갈 때마다 놀라곤 한다. 살림을 하기 전에는 야채, 과일 값이 이리도 비싼 줄 몰랐기 때문이다. 장바구니에 별로 담지도 않았는데 돈 10만 원을 쉽게 웃도니 값을 더 꼼꼼히 따지고 ‘꼭 필요한 건가?’ 스스로 되물으며 장보는 게 습관이 되었다. 올 봄, 올라도 너무 오른 파값에 몇 번이고 파를 들었다 놨다 했다. 파 한 단에 만원이나 하다니 놀랄 ...
우리 집 냉장고는 친정인 광주에서 온 전라도 묵은지로 가득하다. 빨간 고춧가루와 젓갈로 버무린 묵은지는 그 자체로 감칠맛 나는 술안주가 된다. 우리 아버지도 술안주로 김치를 좋아하셨다. 고등학생일 때 친구 분과 막걸리를 드시던 아버지 심부름으로 김치를 가져다 드린 기억이 난다. 마침 집에 김치가 떨어져 한 종지를 겨우 가져다 드렸더니 술기운에 그러셨겠지만, 딱 필요한 만큼 ...
한참 집중하여 일을 하고 있는 오후 4시경, 매월 한 번씩 사무실을 방문해 식물을 관리해주시는 아주머니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행운목에 꽃이 피었어요!” 행운목에 꽃이 핀 걸 보니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며 축하해주시는 아주머니는 행운목에 핀 꽃을 처음 본 것도 아닐 텐데 뭐가 그리 좋으신지 마냥 행복한 표정이었다. 행운목은 늘 내 옆에 있어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학원 일을 마치고 자정 넘어 퇴근하는 나는 피곤한 몸으로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 있다. 바로 신발 정리다. 아침 일찍 일어나 신문과 우유를 꺼내올 아내의 슬리퍼를 현관 중앙에 두고 등교하는 순서대로 고등학생 큰 아들, 그 옆에 중학생 둘째, 초등학생 막내의 신발까지 차례로 정렬해 놓고서야 집안으로 들어선다. 아이들의 얼굴 대신, 아이들의 고단했을 하루를 함께해준...
정월 보름날 아침, 산사 법요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멀리 낙동강이 보이는 부산 운수사 종각에서 스님과 여러 신도가 함께하는 행사였다. 이른 아침 차디찬 산바람으로 인해 추위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직 산에는 어둠까지 남아 있어 체감 기온이 더 낮게 느껴졌다. 법회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스님의 목탁 소리에 맞춰 삼배의 절을 올렸다. 때마침 산등선에 살짝 고개를 내민 해님이...
빛나는 별은 캄캄한 밤하늘에서 더 또렷이 보인다고 했던가. 코로나19는 고등학교 국어교사인 내게 제자들과의 금쪽같은 시간을 앗아간 방해꾼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착한 심성을 재확인하는 계기도 만들어주었다. 학년이 바뀌고 초여름이 되어서야 첫 등교가 이뤄진 작년 6월, 내가 맡은 1학년 1반 교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등교할 때 버스에서 코로나에 감염될까 봐 불안해요, 선생...
나뭇잎이 초록빛으로 옷을 갈아입는 계절이 되면 재작년 여름에 길에서 만난 할머니가 떠오른다. 그날은 간식으로 찐 옥수수를 챙겨 강원도 화천으로 가족 나들이를 떠난 날이었다. 쪽빛으로 물든 파로호의 경치를 감상하며 호숫가를 달리다 잠깐 쉬어갈 겸 호숫가 주차장에 차를 세웠더니 이글거리는 햇빛에 차에서 내리기도 겁이 났다. 그 속에서 여든은 족히 넘어 보이는 할머니가 그늘 한 ...
비밀번호를 입력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