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졸업 후 조기유학을 떠나 미국 조지타운대 외교학부를 졸업한 나는 현재 하버드로스쿨 입학을 유예하고 돌아와 강원도에서 현역 육군 일병으로 군복무 중이다. 내가 주로 학창 시절을 보낸 미국에서는 국민들이 군인에게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병원이나 구청 같은 공공시설은 물론이고 극장이나 카페처럼 일상적인 공간에서도 참전용사를 만나면 시민들...
지난겨울, 우리 부부는 뚜벅이 생활을 청산하고 중고차 한 대를 구입했다. 시기가 잘 맞아 남편의 직장상사가 타던 차를 좋은 가격에 인수한 것이다. 우리 둘 다 장롱면허 소지자였기 때문에 우선 남편이 먼저 연수를 받고 운전대를 잡기로 했다. 운전은 많이 해야 빨리 는다기에 우리는 주말마다 어디든 나갔다. 교외에 있는 아웃렛도 가고, 대형마트도 다니며 남편은 서서히 운전감을 익...
시골에서 나고 자라 농촌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던 나는 아주 작은 땅이라도 좋으니 채소를 가꿀 텃밭을 갖고 싶었다. 그 꿈이 이루어진 건 4년 전 선배 언니가 남는 밭이 있다며 내게 나눠주면서부터다. 비록 3평 남짓의 작은 텃밭이었지만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하지만 방치되어 있던 밭에는 호박넝쿨이 심란하게 엉클어져 있었고 잡풀들의 잔해도 상당했다. 마음을 다...
모처럼 남편과 내가 함께 직장을 쉬는 날이었다. 휴일을 맞아 이발도 하고 목욕탕도 다녀오겠다는 남편에게 나는 마트에 같이 가자고 했다. 아들이 선물로 준 상품권으로 장을 볼 계획이었다. 그 마트에서 파는 피자가 맛있다기에 장을 보고 피자 한 판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소문대로 피자는 크고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한쪽을 떼어내 남편에게 건네주고, 내 것과 아들 것도 접시에 덜고...
남편의 유학을 위해 캐나다에 온지도 7년째. 타국살이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지만 요즘은 한국에 있는 보고 싶은 얼굴들이 부쩍 많아졌다. SNS로나마 친구들의 안부를 챙기려고 얼마 전 인스타그램 계정을 개설했다. 그러자 몇몇 낯익은 이름으로부터 팔로우 요청이 들어왔다. 한국에서 초등학교 6학년 담임으로 재직할 때 가르친 제자들이었다. 당시 제자들과 했던 약속이 떠올라 난 기꺼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순간을 결국 맞이하고야 말았다. 작년까지만 해도 딱 맞던 정장 바지가 숨도 못 쉴 만큼 작아진 상황! 잠기지 않는 단추와 낑낑대며 씨름해봤자 소용이 없기에 얼마 전, 운동도 할 겸 시간을 내 수선집에 바지를 들고 갔다. 수선집에서 내려준 처방은 더 절망적이었다. 시접 여유가 없어 허릿단을 늘릴 수가 없는데 정 수선하고 싶으면 고무줄 바지로는 가능하다는 답...
오늘도 나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열심히 거리를 청소한다. 나는 쓰레기를 치우는 공공근로자다. 처음에는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칠까 창피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실업자로 우울감에 빠져 지냈던 과거에 비하면 얼마나 소중한 시간인지도 모르고. 지난해 봄, 동네 작은 분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일에 매달렸지만 코로나19 때문에 생계 수단을 ...
지난 가을, ‘죽은 자의 날’이란 멕시코 축제를 소재로 한 애니메이션 코코를 보았다. 죽은 사람들이 산 자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지는 순간, 저승에서도 그 존재가 가물가물해지다가 사람들에게 완전히 잊힐 때 진정한 죽음을 맞게 된다는 스토리 때문인지 얼마 전 기일(忌日)을 지낸 아버지 생각이 났다. 10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를 나는 일 년 중 몇 날은 기억하고, 또 그중의 몇 날은 잊고 지냈다. 자주 찾아봬야 했지만 당신 살아계실 때 더 살갑게 해...
고등학교 국어 교사인 나는 안타깝게도 그림에는 영 소질이 없다. 미술 학원 한번 다닌 적이 없었고, 남들보다 재능도 부족한 것 같아 학창 시절 미술 숙제를 하면서 좌절감을 느낄 때가 많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도 봄의 연초록과 분분히 날리는 흰 꽃잎들, 무성하고 짙은 여름의 갈맷빛 숲, 가을철 화려한 단풍의 향연, 겨울의 황량함을 그림으로 표현해보고 싶다는 욕심은 수그러들...
여행을 갈 때마다 빼놓지 않고 하는 일이 하나 있다. 현지에서 산 엽서에 나 자신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감회가 적힌 엽서를 여행에서 돌아와 받아보는 경험은 새롭고도 즐겁다. 매번 나에게만 엽서를 쓰다가 이번엔 인생의 동반자가 될 신랑에게 엽서를 썼다. 작년 1월 스위스로 신혼여행을 다녀오면서 우리는 서로에게 엽서를 써서 보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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