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사시던 집에 새로 입주한 분에게서 연락이 왔다. “농협 지점장님이 다녀가셨는데 아버님 앞으로 조합원 출자금이 있으셨다고, 6천 얼마인가 된다더라고요.” “네? 6천이요?” 아버지는 3년 전 우리 남매에게 우애와 화합의 가르침을 유언으로 남기고 떠나셨다. 흔히 볼 수 있는 자식 간 상속 다툼 같은 게 일절 없었던 것은 오롯이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의 유산은 20년...
며칠 전 이발을 하러 갔다. 멈춰버린 기찻길 너머로 낡은 삼색등이 힘차게 돌아가는 50여년 된 경남 사천의 현대이용원에는 아직도 손 가위질로 이발을 하고 비누거품을 머금은 노구의 면도기와 녹슨 바리캉이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내게 가운을 씌우고 가위를 잡으신 아저씨는 “오늘이 마지막 이발이네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아저씨는 2년 전 허리수술을 받은 뒤로 종일 서서 이발하는 ...
서울에서 택시기사를 시작한 지 1년쯤 되었을 때의 일이다. 밤 9시경 여의도에서 탄 손님을 청담동 사거리에 내려주고 인근 백화점의 택시 승강장에 차를 멈췄다. 사실 배가 고팠는데 강남 지역에는 기사식당이 드물어 조금 더 참기로 했다. 백화점 건너편 골목에는 맛집과 멋진 카페가 즐비해 택시 손님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손님이 적어 내 차례가 오기까지 자그마치 30분...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고 동네 병원에 갔더니 규모가 작은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진료실이 있는 3층까지 계단을 걸어 올라갔더니 금세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치매를 앓고 있는 구순이 넘은 어머니는 기분이 좋았던지 아들의 목을 꽉 껴안았다. 과거 어린 내가 당신의 등에 업혀 목을 껴안던 것처럼. 어렸을 적 나는 좀처럼 어머니 등에서 내려오지 않으...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어 틈틈이 해변을 산책하며 심신의 건강을 다지고 일상의 무료함을 풀어내곤 한다. 바닷가 산책에 나설 때면 내가 꼭 하는 일이 있다. 버려진 소주병, 맥주병 등을 모아 오는 일이다. 산책을 마칠 때면 운동을 하거나 낚시를 하고, 또는 수다를 떨며 술을 마시고 가면서 버린 빈병들이 배낭에 가득 찬다. 모아 온 빈병은 아파트 발코니에...
짙푸른 녹음이 절정을 향하던 어느 여름날, 공원 한쪽에서 자신이 찍은 꽃 사진을 보며 해맑게 웃으시던 노신사를 만난 일이 있다. 노신사의 웃음은 내게 신선한 감동으로 다가왔고 사진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서툴렀지만 차츰 사진의 매력에 눈을 뜨게 되자 그때 그 노신사의 웃음이 카메라를 통해 피어나기 시작했다. 요즘은 직접 촬영한 사진을 엽서로 만들어 나...
“엄마, 잘 있어. 다다음 주에 또 올게요.” 신발을 다시 고쳐 신으려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순간 뒤에서 나를 끌어안는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다. 엄마는 양손으로 내 손을 꼭, 아니 꽉 움켜쥐며 다시는 펴지 못하게 할 기세였다. 내 손에는 종이접기 하듯 반의반으로 접힌 오만 원 권 몇 장이 들려졌다. 엄마는 아무 말 말고 가져가라며 한 손으로 내 등을 두드렸다. “재난 지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무서운 기세로 확산되던 지난 3월, 늦은 나이에 건축업을 시작했던 남편은 작은 건축 회사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의 경험을 밑천으로 개업을 앞두고 있었다. 그 10년 사이에 초등학생이던 큰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남편과 나는 자식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막중한 책임을 요하는 일인지 실감했다. 다행히도 삶이 고행처...
2011년 제주도로 연구학교 탐방을 갔을 때의 일이다. 연구보고대회가 끝나고 학교에서 제작했다는 봉선화로 물들인 스카프를 선물로 받았다. 목에 두르니 색깔도 곱고 촉감이 아주 좋아 나도 학생들과 함께 봉선화 스카프를 만들어보고 싶어졌다. 이듬해 봄, 봉선화 씨를 뿌려 잘 가꿔 여름방학 전에 ‘봉선화 축제’를 열었다. 축제날 학교는 그야말로 봉선화 천국이었다. 아이들은 화단에...
6월의 어느 아침, 부엌 창밖으로 유난히 부산하게 날아다니는 새가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밖을 내다보니 커다란 가스통 주위로 새가 날아다니고 있었다. 얼마 뒤 새는 가스통 뚜껑 속으로 쑥 들어갔다. ‘혹시 새가 알을?’ 괜히 내 가슴이 콩닥콩닥거리고 조마조마해졌다. 확인을 위해 가스통으로 다가갔더니 체리나무 위에 있던 어미가 다급하게 깍깍거렸다. 그 모습을 보니 내 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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