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집 앞에 우뚝 서 있는 은행나무를 바라보는 것이 나의 작은 즐거움이다. 하지만 20년 전 내가 처음에 이곳에 이사 왔을 때만 해도 은행나무가 결코 반갑지만은 않았다. 담장 너머 바로 옆집과 맞닿은 텃밭에 자리한 은행나무는 가을이 되면 우수수 노란 은행잎을 떨궈 거추장스럽고 귀찮은 존재였다. 몇 년 후 텃밭 한가운데로 새로운 길이 나게 되었다. 그 바람에 나무는 아예 건...
딸아이가 7살 때의 일이다. 어느 날인가 유치원 선생님이 봉투 하나를 건네주셨다. “이걸 아이 앨범에 넣어주면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집에 돌아와 봉투를 열어보니 하얀 종이 위에 크레파스로 학교를 그린 그림에 삐뚤삐뚤한 글씨로 “나는 책이 좋아서 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쓴 카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왜 선생님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할머니가 자기를 볼...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우리들의 가슴을 너무도 아프게 하는 요즘이다. 중소기업을 비롯한 소상공인들은 존폐의 위기에서 허덕이고 실업자는 갈수록 늘어 너도나도 아우성이다. 하루하루 건설현장에서 일을 하는 남편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남편은 지난 2월 광화문 일을 끝으로 현장 일이 잡히질 않아 근심이 가득했다. 그러던 며칠 전 지인으로부터 가까스로 가정집 일을 소개받았다. 출...
주말 아침 날씨가 너무 좋아 아파트 단지 안에 있는 놀이터에 나가보았다. 마침 위층에 살고 있는 아빠와 두세 살쯤 돼보이는 아이도 산책을 나온 모양이었다. 아이는 평소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마주칠 때면 늘 활짝 웃곤 하는데 “안녕!” 하며 손을 흔들거나 하이파이브를 하기도 하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전에 꼭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 기분이 좋아지곤 했다....
코로나19 예방의 최일선에 서 있는 내게 지난 석 달은 잠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시각에도 ‘확진자 발생’을 알리는 전화 한 통화에 지체 없이 사무실로 달려 나오는 게 일상이었다. 숨고를 틈도 없이 확진자를 병원으로 이송시키고 동선 파악 및 소독, 지역사회 감염을 막기 위한 심층 역학조사를 위해 몇 번씩 발품을 팔며 CCTV를...
어머니 댁 현관문에 번호키를 달아드렸다. 팔순을 훌쩍 넘긴 어머님이 사용하기에는 일반 열쇠가 더 나을 성 싶은데 뜬금없이 번호키를 달고 싶다고 해 이유를 여쭤보니 평소 친하게 지내는 옆집 할머니가 며칠 전 번호키로 바꿨다고 했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옆집 할머니에게 유난히 샘을 많이 내신다. 자주 어울리는 동네 친구들 가운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몇 ...
첫째는 딸이라 그런지 태동이라고 해도 큰 움직임이 없었다. 가만히 있을 때 어쩌다 꿀렁, 하는 정도라서 아이의 태동을 반가워했었다. 하지만 아들인 둘째는 확연히 달랐다. 어찌나 격정적이었는지, 나는 수시로 걸음을 멈추거나 순간적으로 몸을 웅크려야만 했다. 배속에서부터 활동량이 많았던 아이는 태어나서도 잠시도 가만있지를 않는다. 대개 아들들이 활동적이라 해도 둘째는 과하다 싶...
지난 토요일 오후, 알래스카 앵커리지에 살고 있는 나는 장을 보기 위해 차를 끌고 마트로 향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모두들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며 집에서만 지낸지도 어언 한 달이 넘었다. 하지만 날이 풀려서인지 홈리스들이 거리에 하나둘 나와 있었다. 마침 라디오에서는 홈리스들이 감염에 가장 취약하다는 멘트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나는 본능적으로 자동차 잠금 버튼을 눌렀...
나는 매일 지하철을 이용하는, VIP급 지하철 애용자이다. 지하철은 책을 읽는 도서관이 되기도 하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사색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요즘은 지하철을 탈 때마다 아버지 생각을 자주 한다. 십여 년 전 군 생활을 할 무렵, 공군이었던 나는 6주에 한 번씩 집으로 외박을 나올 수 있었다. 그 당시에도 부대로 복귀하기 위해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로 갈 때면 집 ...
현관문이 폭풍을 맞은 듯 내 코앞에서 ‘쾅’ 하고 닫힌다. 오늘도 이 엄마의 잔소리는 닫혀버린 현관문에 가로막힌다. “시간을 잘 지켜야지. 이제 나가면 안 늦어?”라는 말이 그리도 녀석을 화나게 했단 말인가? 식탁에서 이 상황을 전부 지켜보고 있던 작은 녀석은 싸늘한 분위기를 풀어보려 장난스럽게 반달눈을 만들어 보인다. 초등학교 1학년인데도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려는 마음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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