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신입교사 시절에 겪은 일이다. 영어수업을 시작하려는데 맨 앞에 앉은 재윤이가 고개를 숙이고 다른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요 녀석 수업 준비도 안하고 계속 책을 보다니!’ 아까도 주의를 줬는데 소용이 없었다. 이번에는 좀 더 단호하게 말해야지 싶어 재윤이 앞에 다가가 책을 집어 들자 녀석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재윤이의 왕방울만한 눈이 빨갛게...
코로나19 바이러스로 돈이 있어도 마스크를 구입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는 일들이 많아졌다. 그럼에도 따뜻한 마음들이 이어져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란 걸 느낀다. 어느 기초수급자 할머니 한 분은 손수 한 땀 한 땀 기워 만든 면 마스크를 만들어 주민센터에 전달했으며 어린 아이부터 시작해 여기저기에서 마스크를 기부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이 훈훈해진...
“엄마, 지네! 지네! 엘리베이터 앞에 지네가….” 딸내미의 다급한 소리에 애들 아빠가 스프링처럼 튀어나간다. ‘으이구, 또 호들갑이네. 지네는 무슨, 그냥 작은 벌레겠지.’ 딸아이에게 이미 여러 번 당했던 터라 난 두루마리 휴지를 들고 대수롭지 않게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그런데 지네가 나타났단 엘리베이터에서 뜻밖에도 아들 내외가 나오는 것이 아닌가. 아들 손에는 초가 꽂힌...
30여 년간의 공직생활을 정리하고 조그만 회사에 다니며 단조로운 아파트 생활을 하던 중 주말에 쉴 요량으로 시골에 작은 오두막을 마련했다. 입춘이 지날 무렵 어머니와 형님 내외가 돼지감자를 캐러 오두막을 찾아왔다. 돼지감자 수확이 끝난 후 어머니는 허술한 오두막 장독대를 수리하시겠다고 팔을 걷어붙이셨다. 장독 10여 개가 모여 있지만 이사를 하면서 깨진 시멘트 덩어리나 도로...
2017년부터 내 일기장의 이름은 ‘행복일기’다. 그때는 샘터를 구독하지 않았을 때인데 왜 그렇게 정하게 됐을까? 나는 국민학교 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써왔다. 과거 일기장을 들춰 지난 일들을 들여다보노라면 즐거운 일보다 지울 수 없는 아픔이 더 많이 차지하고 있었다. 행복했던 젊은 날은 어디가고 차마 떠올리기조차 힘든 일만 적혀 있었다. 스스로 반성하며 그날부터 나는 ‘행복...
우리 동네에는 소를 몇 마리 키우는 집이 있다. 그 집 마구간에는 할머니, 어미형제, 새끼까지 총 다섯 마리가 삼대를 이루며 정답게 살고 있다. 하루는 소 울음소리가 유난히 구슬프게 들려 길에서 만난 그 집 아주머니께 소가 왜 저렇게 자꾸 우느냐고 물어보았다. 아주머니는 착잡한 표정으로 “오늘 어미 소 한 마리만 남겨두고 네 마리를 팔았는데 가족을 잃고 마음이 허전해서 그런...
나에게는 ‘배추김치’라고 부르는 친구가 있다. 몇 해 전, 이사 준비하느라 바빠 끼니도 제대로 해먹지 못하고 거의 배달음식으로 지내고 있을 때 친구가 배추김치를 담갔다면서 두 포기나 가져다주었다. 너무 배달음식만 먹어 입맛도 없던 참에 싱싱한 배추김치가 식탁에 오르니 입맛이 당겨 오랜만에 포식을 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 부부에게 친구는 배추김치란 애칭으로 각인되었다. 맛있는...
아버지는 내가 스물네 살이던 해 세상을 떠나셨다. 아버지를 여읜 슬픔이 컸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당신도 편히 쉬실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약간의 안도감도 들었다. 그만큼 아버지는 한평생 고생만 하다 가셨다. 가난하던 그 시절, 우리 삼형제가 신던 운동화의 종착지는 아버지였다. 때가 타고 닳고 닳아 버리려는 운동화를 아버지는 괜찮다고 하시며 신으셨다. 무뚝뚝한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
“올해는 담배를 꼭 끊어야지!” 연초가 되면 거의 모든 애연가들이 금연을 하기로 마음먹지만 그 약속을 지키기란 정말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나 역시도 금연을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습관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 시도 때도 없이 담배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올랐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손에는 어김없이 담배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는 특단의 조치를 세워야 했...
얼마 전부터 어머니를 모시고 마을 앞 내성천에 자주 나간다. 뇌졸중 후유증으로 편마비를 앓고 있는 어머니의 재활을 위해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정정하시던 어머니는 하루아침에 보행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가 되셨다. 지금도 내 부축을 받아 간신히 걸음을 옮기시는 처지다. 철의 여인 같던 어머니가 백발의 노인이 되는 세월 동안 내성천도 많이 변했다. 천변에 늘어서 있던 미루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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