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가져온 받아쓰기 시험지를 보고는 눈앞이 캄캄했다. ‘0점’이라고 적힌 붉은 글씨가 유난히 눈에 크게 띄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학교 들어가서 처음으로 치른 받아쓰기 시험이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아이가 쓴 낱말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하지만 맞춤법이 틀린 낱말이 한 개도 없었다. 글씨도 또렷또렷, 반듯반듯하게 잘 써서 누가 봐도 백점짜리였다. 선생님께 전화로 ...
“할머니,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어린 시절 학교 가기 전 할머니 방에 인사를 드리러 가면 밝은 아침햇살이 방안 가득했다. 햇살을 머금은 할머니의 얼굴은 참 곱고 예뻤다. 내 방은 햇살이 들지 않아 컴컴한데 이상하게 할머니 방에는 환한 햇살이 비추었다. 어린 나는 ‘햇살은 우리 할머니를 좋아하나 봐’라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내가 배가 아프면 약손을 해주셨고, 달콤한 사탕이 ...
어린 시절 어느 여름 밤, 고향 영암 영보에서 있었던 일이다. 친구들과 떠들고 장난을 치던 소년의 눈에 극성스런 모기떼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자에 마주앉아 있던 동네 형들이 들어왔다. 흰 수염을 늘어뜨리고 정좌한 도사처럼 형들은 요지부동의 자세로 흰 돌과 검은 돌을 번갈아 놓았다. 바둑을 두는 것이라 했다. 호기심을 느낀 나는 그때부터 어깨너머로 눈동냥하며 바둑의 세계에 입문...
“이제부턴 내 생일에는 내 손으로 미역국 안 끓일 거야.” 몇 년 전 내 생일에 남편에게 선포했던 말이다. 남편과 아이들의 생일에 끓이는 미역국을 내 생일에까지 직접 끓이고 싶지는 않았다. 라면과 계란 프라이밖에 할 줄 모르던 남편은 결국 인터넷에서 레시피를 찾아 이듬해 내 생일부터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예상보다 맛있었던 남편의 미역국을 먹으며 둘째 딸이 말했다. “아빠, ...
나는 한 가정의 가장이자 남편으로 그런대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자부하며 살아왔다. 없는 살림살이로 어렵게 결혼하고 자식도 둘이나 낳아 공직자로 성장시켰다. 그리 큰 회사는 아니어도 나름 잘 나가는 회사의 임원도 해보았다. 그런대로 흠결 없는 삶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내와 대화하다가 큰 충격을 받았다. 칠십년 세월을 돌아보며 아내에게 물었다. “나는 당신에게 어...
내가 일을 도와주고 있는 과수원은 잡초를 일일이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 주인이 친환경 농업재배자로 등록되어 있어 제초제를 함부로 뿌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초기가 있어 수고를 덜었지만 그래도 그 넓은 산비탈 밭의 잡초 제거는 예삿일이 아니었다. 특히나 과수원 과일나무 밑에는 유난히 풀이 더 잘 자라는 것 같다. 과일나무가 잘 자라 튼실하고 맛 좋은 열매를 맺으라고 뿌...
정년퇴임을 한 지 2년이 지난 요즘, 다시 학생이 된 기분으로 남편과 함께 동네에 있는 문화센터를 다닌다. 한 학기 동안 소액의 수업료를 내고 라인댄스, 노래 교실, 한자, 명심보감, 도덕경, 민화, 요가, 서예 등을 마음껏 배울 수 있는 곳이라 우리 부부에겐 그야말로 인생 2막의 배움터요, 신나는 놀이터다. 처음에는 노래교실에 남자 회원이 없어 남편과 같이 다니기가 민망했...
1980년대 후반 고등학교를 다니느라 전북 익산의 한 골목집 단칸방에서 자취를 한 적이 있다. 어린 나이에 혼자 객지 생활을 시작한 나는 한겨울에도 수시로 연탄불을 꺼트렸고, 연탄이나 곤로에 밥을 짓다가 냄비를 태워먹을 정도로 모든 게 서툴렀다. 가끔 시골에서 반찬을 갖다주러 올라온 엄마는 왠지 쌀쌀맞게 대하는 주인집 아주머니보다 앞집 아주머니와 더 많은 얘기를 나누다 돌아...
“아빠, 왜 할아버지 제사상에는 꼭 홍시를 올려요?” 제사상에 올라온 홍시를 두고 딸아이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에 또 가슴 한 구석이 눅눅하게 젖어온다. 감나무집 막내아들로 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라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되살아난 까닭이다. 홍시를 보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더욱 그리워진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아버지는 직접 감 농사를 지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제...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다 무심코 아내의 프로필 사진에 시선이 멈췄다.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 서울 56km, 평양 205km’라고 쓴 도라산역의 안내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었다. 열차 승무원인 아내는 한 달에 한 번꼴로 도라산역을 방문한다. 새벽부터 일어나 출근준비로 부산한 아내를 위해 비번 날이면 나는 가능한 일찍 일어나 아내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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