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자녀를 둔 가장이다. 처음에는 외벌이였지만 어느덧 아이들이 중고생이 되어 학원비가 늘어나면서 여느 가정처럼 맞벌이가 되어버렸다. 아내가 일을 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빨래와 설거지할 그릇이 쌓이는 일이 다반사였다. 더욱이 아내는 세 아이를 출산하고 키워내느라 몸도 많이 약해져 걱정이 앞섰다. 우선 눈앞에 쌓이는 집안일부터 거들기 시작했다. ...
시골에 계시는 엄마는 가끔씩 우리 집에 올라오신다. 혼자 직장 생활하는 딸내미가 밥은 잘해 먹고 사는지, 청소는 제때 잘하고 사는지 걱정스럽기 때문이다. 그 마음을 알기에 엄마와 전화를 할 때 “엄마, 나 밥 잘해 먹고 있어. 걱정 말라니까. 어제는 삼겹살도 구워 먹었어”라며 안심을 시키지만 엄마는 좀처럼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다. 며칠 전에도 엄마가 다녀가셨다. 내가 회...
매년 4월 샌프란시스코 재팬타운에서 열리는 ‘체리 블라섬 페스티벌’에 모처럼 아버지를 모시고 나들이를 간 날이었다. 일본 문화를 소개하는 부스들 속에서 바둑판을 발견한 나는 초등학생 때의 추억이 떠올라 아버지께 물었다. “이것 보세요, 바둑이예요! 아버지, 몇십 년 전 여름방학 때 저한테 바둑 가르쳐 주신 일 기억하시죠?” 하지만 38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와 이제 아흔 살...
‘모히또에서 몰디브 한잔 중!’ 며칠 전 결혼한 명훈이가 신혼여행 사진을 보내왔다. 허니문을 제대로 즐기고 있는 녀석의 문자에 웃음이 지어졌다. 20년 지기 친구 명훈이는 지난 주말에 결혼을 했다. 춘천에서 군인으로 근무했던 터라 예식도 춘천에서 이루어졌다. 기꺼이 사회를 봐주기로 한 나는 이른 아침부터 결혼식 갈 채비로 바빴다. 가뜩이나 단풍철이어서 고속도로가 꽉 막힐 게...
내가 근무하고 있는 아파트 관리실은 작은 식당과 마주 보고 있다. 어느 날, 식당 앞에서 행색이 남루한 스님이 탁발을 하고 있었다. 가을바람이 제법 차가울 텐데 반팔의 장삼을 입은 스님이 안쓰러워 호주머니에 있던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드렸다. 그로부터 30여 분 뒤 일주일에 한 번 전기시설을 관리하는 업체의 여 부장이 방문을 했다. 평소에는 같이 점검을 하러 내려갔지만 ...
퇴근길 딸아이가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 집에 들어왔다. 혹시 가족 기념일을 깜빡하고 잊은 건 아닌지 기억을 더듬어봐도 딸아이 생일은 지난주였고,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은 20여 일이나 남아 있었기에 의아했다. 더구나 꽃다발이 한 개가 아니고 세 개나 돼 영문을 모르는 아내와 나는 서로 얼굴만 쳐다보았다. 아이는 꽃다발에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귀가하는 길에 지하철 입구...
새벽 바람결이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맛보는 것처럼 한결 부드러워졌다. 역시나 오늘 아침에도 사람들이 새벽 공기의 달콤함을 마음껏 누리며 걷고 뛰고 있다. 나도 1시간을 걷고 난 후 마무리 운동을 위해 공원이 바라보이는 언덕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무릎을 굽혔다 폈다 하고 난간을 잡고 몸을 젖히기도 하는데 몸을 젖히고 보면 하늘 가득 멋진 그림이 그려져 있다. 하늘을 수놓은 나뭇...
“엄마 사랑해!” 우리 집 막내인 여섯 살짜리 지혜가 킥보드를 사달라고 조르는 소리다. 남편이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했는데도 며칠 동안 내 주변을 돌며 온갖 애교를 다 부리고 있다. 전에 없이 후해진 뽀뽀와 손가락 하트를 날린 후 언제나 “엄마, 나 킥보드 사줘!”로 마무리되는 딸의 귀여운 투정이 참 깜찍했다. 대화의 끝은 무조건 킥보드 타령이다. 분명 다른 이야기를 하는...
나는 매일 9호선 신논현역과 2호선 서울대입구역을 오가며 열심히 밥벌이를 하고 있다. 매일 똑같은 일상을 반복하다 보면 각박한 도시 속에서 내가 마치 쳇바퀴를 돌고 있는 다람쥐가 아닐까 하는 회의가 든다. 독서는 이런 나를 잠시나마 평온한 시간에 젖어들게 해준다. 그중에서도 《샘터》를 읽을 때면 여유와 행복을 느끼게 된다. 그날도 어김없이 지하철 모퉁이에 기대어 지난 호 샘...
딸 아이는 늘 인형을 끼고 다니며 동생 대하듯 다정하게 말을 건넨다. 어느 날 잠들기 전 평소대로 엄마와 장난도 치고 간지럼을 태우며 놀던 딸아이가 별안간 벽을 향해 돌아눕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엄마, 쥬쥬가 보고 싶어.” 쥬쥬란 다름 아닌 5천 원짜리 플라스틱 인형이다. 한쪽 다리가 자꾸 빠져 본드로 고정도 하고 골반 전체를 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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