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재작년에 돌아가신 할머니가 꿈에 나오셨다. 모처럼 할머니 얼굴을 볼 수 있어 꿈에서나마 행복했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자상하고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경북 김천에서 농사지으시던 할머니는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내게 주려고 과자며 사탕이며 젤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다. 내가 일곱 살 때, 우리 집에 오신 할머니와 저녁을 먹고 가족들이 둘러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가을걷이를 마치신 친정 엄마가 수확한 고구마를 가져다 먹으라고 전화를 주셔 시골에 내려간 어느 주말이었다. 하필 부슬부슬 비가 내려 밭에 나가지 못할 상황이라 우리는 모처럼 한가롭게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비가 오면 몸이 먼저 아는지 여기저기 안 쑤시는 데가 없네.” 그날따라 엄마가 아픈 다리와 허리를 토닥이는 게 마음이 쓰였다. 가족들이 모인 날이니 다 같이 뜨끈뜨끈한...
지난해, 오랜 교직생활을 정리했다. 아직 정년퇴직하기에는 이른 나이였지만 건강상의 이유와 개인적인 사정이 겹쳐 조금 일찍 학교를 나오기로 결심했다. 30여 년간 쉼 없이 국어교사로 근무하며 휴식이 간절했던 참이었다. 그 때문에 아쉬움보다는 홀가분함이 더 컸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갑자기 무료해진 일상에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게다가 갱년기 우울증까지 찾아와 괜스레 의욕이 떨...
올해 아흔을 넘기신 아버지는 누구보다 규칙적인 일상을 유지하고 계신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6시에 아침식사를 하시고 을지로 사무실로 향하신다. 40년 동안 운영하시던 ‘까운사’ 사장 자리를 내게 물려주고 난 뒤에도 여전히 경기도 고양 집에서 을지로 까운사까지 출근하신다. 그리고 그 길에는 20년 동안 아버지의 벗이 되어주는 지팡이가 항상 동행하고 있다. 이북이 고향이...
우리 부모님은 충북 음성에서 수박농사를 짓고 계신다. 비닐하우스에서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도 무럭무럭 커가는 수박을 보면 더위도 견딜만하다고 두 분은 입을 모아 말씀하신다. 얼마 전 엄마 생신을 맞아 시골집에 내려가 온 가족이 둘러앉아 밥을 먹고 있는데 엄마가 처음 듣는 얘기를 꺼내셨다. “네 아빠, 어제 문자 받고 표정 관리 중이시잖니.” “무슨 문자? 누구한테요?” 자초...
우리 며느리는 뮤지컬 배우다. 대구에 살고 있는 며느리에게 김천혁신도시의 초등학교에서 방과 후 뮤지컬 수업 일이 들어왔다. 그 얘기를 듣고 운전을 못하는 애가 대구에서 어떻게 다니려나 걱정이 되었다. 며느리는 기차 타고 다니면 된다고 씩씩하게 웃었다. 하지만 김천역에서 초등학교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걸어서 가기에는 꽤 먼 거리였다. “어머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역 앞...
유년기를 떠올려보면 난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아이였다. 마흔이 다 되어 낳은 늦둥이 딸을 애지중지한 엄마는 매일 고기반찬을 상에 올리고, 내가 갖고 싶은 것이라면 흔쾌히 사주셨다. 당시 동대문 시장에서 도매업을 했던 엄마는 사람 한 명이 들어서면 꽉 차는 작은 가게에서 옷 장사를 하셨다. 밤새 장사를 하고 지친 기색으로 아침에 돌아와서도 나를 꼭 안고 등을 쓸어주던 손길이 ...
누구에게나 지친 일상을 달래는 자신만의 특별한 취미가 있다. 내게는 종점에서 종점까지의 버스여행이 그렇다. 그런 날이면 나는 즐겨 마시는 캔 커피와 좋아하는 노래가 가득한 플레이 리스트를 챙겨 버스에 오른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좌석은 맨 뒷자리 앞의 오른쪽 자리. 이 자리는 그나마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상황이 잘 생기지 않아 종점까지 편하게 앉아서 갈 수가 있다. 버스 종...
요즘 영화관 매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난 영화 상영시간이 가까워오면 그야말로 전쟁 같은 시간을 보낸다. 팝콘과 음료의 재고를 파악해 부족한 물량을 채워넣어야 하는 데다 손님들이 제일 길게 줄을 서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만난 한 여대생도 상영시간을 얼마 안 남기고 줄을 선 손님이었다. 약속한 친구가 제시간에 오질 않는지 혼자 영화표 두 장을 들고 초조한 표정으로 팝콘...
집에서 가까운 중랑천 둑길은 나의 단골 산책코스이자 출퇴근길이다. 올해도 중랑천에 여름 색이 완연해진 걸 보며 어느덧 내 기억은 세월을 역류해 두메산골 고향에서 큰형님과 물고기를 잡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6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난 나는 아버지뻘이 될 정도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큰형님이 늘 어렵고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런데 딱 한 가지 어린 내가 큰형님과 죽이 척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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