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기억조차 희미한 옛일이 떠올라 때늦은 후회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일곱 살 무렵, 여름 해가 쨍쨍 내리쬐던날 물을 길어오다 마주친 어느 젊은 탁발승이 지금도 기억이 난다. 목이 마르니 물 좀 나눠줄 수 있겠냐고 다가온 스님에게 얼결에 거짓말을 하고 말았다. “우리 집은 교회 다니는데요.” 스무 살 무렵, 반대의 경우를 경험한 적도 있다. 팍팍한 삶에 지쳐 배낭을 꾸려 ...
10년 가까이 입시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다 보니 별별 재밌는 녀석들을 만나게 된다. 요즘 내 웃음의 원천은 얼마 전 새로 들어온 중3 원엽이다. 원엽이는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인상도 무서워 친구들도 처음엔 다가가기 힘들어 했다. 하지만 가만히 지켜보니 녀석은 참 엉뚱한 구석이 많은 순둥이였다. 어느 날 쉬는 시간에 아래층 편의점에 갔더니 원엽이가 라면과 삼각김밥, 샌드위치의...
혼전임신인 걸 알고 급하게 식을 올렸는데, 연년생으로 둘째까지 생기자 10년이나 다닌 직장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직장으로 돌아갈 일이 없어진 나는 결국 2년 전 남편의 직장이 있는 이곳 화성시 향남읍으로 이사를 왔다. 하지만 결혼 전 의류무역을 위해 해외를 종횡무진하다가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적한 곳에서 전업주부로 살다보니 예기치 못한 우울증이 찾아왔다. ‘결혼 후에...
복부 대동맥류 절제술이 잘되어 곧 퇴원하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잇단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하시고 돌아가셨다. 수술만 받으면 다시 건강해질 거라 믿었는데 입원하신지 20일 만의 일이었다. 장례식을 끝내고 유품을 정리하면서 난 끝없이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를 맨몸으로 버텨야 했다. 옷에 밴 아버지의 체취를 맡으며 오열하고, 피우시던 담배꽁초를 주워 입에 물어 아버지의 숨결을 느껴봐...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매년 6월이 되면 먼 타국에서 만난 푸른 눈의 할아버지가 불러주던 노랫가락이 귓가에 맴돌아 마음이 짠해진다. 할아버지와의 만남은 내가 미국에서 살던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출근길에 들른 패스트푸드점에서 주문한 메뉴가 나오길 기다리던 중 어디선가 “굿모닝”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한...
커튼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때문에 절로 눈이 떠졌다. 다들 아직 늦잠에 취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언제 일어났는지 큰딸 아이가 TV 앞에 앉아 재방송으로 나오는 아이돌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다. 리모컨을 손에 쥔 아이가 볼륨을 계속 키우기에 “TV소리가 너무 커. 좀 줄여줄래?” 하고 주의를 주어도 아이는 계속 “엄마, 난 소리가 잘 안 들려요!” 하며 딴청을 피웠다. ...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남편과 충북 제천의 작은 시골 마을로 귀촌한 지 2년째에 접어들었다. 밤낮없이 관련 서적을 탐독하고 이웃 농가에 조언도 구하며 우리는 열심히 한우 농장을 꾸려가고 있다. 힘들고 어렵지만 건강히 자라는 소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낄 때가 많다. 작년 5월은 평생 잊지 못할 기쁜 순간을 맞이했던 달이다. 한우 농장을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첫 가족으로 맞이한 임신...
지난 2월, 방학 중이던 고등학생 딸아이가 방에서 나오더니 “엄마, 오늘 우리 동네로 헌혈차가 왔대요. 지난번처럼 헌혈 못해서 아쉽다고 하지 말고, 오늘은 꼭 나랑 같이 가요” 하며 팔을 잡아끌었다. 한 달 전 딸아이의 권유에 못 이겨 얼떨결에 헌혈을 하러 갔다 온 일이 떠올라 가슴이 두근거렸다. 사실 나는 어려서부터 겁이 많고 잔병치레가 심해서 한 번도 헌혈을 해본 일이 ...
독학으로 중국어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장에서 팸플릿을 나눠주며 상품을 홍보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내국인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많이 찾는 곳이라 어쩌다 중국인 손님이 눈에 띄면 나는 혼자 공부한 중국어 실력만 믿고 ‘환잉꽝린(어서 오세요)!’을 외치며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중국인 손님이 중국어로 말을 걸어왔다. 물건에 대해 조금 더 자...
충북 진천 덕산양조장 나는 친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 아버지가 열일곱 살 때,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기 여섯 해 전에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제사상에 놓인 사진으로만 남아 있었다. 그러다 집안의 이야기에 불쑥 등장해서 빈약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출생의 비밀이나 가로챈 유산, 만주로 떠난 디아스포라(Diaspora)의 애환 같은 절절한 드라마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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