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회사 구내식당에서 간식으로 국수를 삶아 내왔다. 국수 그릇을 받아들고 주위를 두리번거리자 식당 아주머니가 의아해하며 필요한 게 있느냐고 물었다. “식초 몇 방울만 넣으면 좋겠는데….” 조금은 유별난 내 식성을 설명해 주자 마음씨 좋은 아주머니는 얼른 주방에서 식초병을 가져다주었다. “고맙습니다. 잘 먹을게요.” 깍듯이 인사를 하고 그릇 위로 병을 기울이자 주르륵, ...
나는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3동에서 15년째 마트를 운영하고 있다. 한 자리에서 오래 장사하다 보니 동네 주민들의 얼굴이 대부분 눈에 익는다. 아침부터 싸락눈이 내리던 지난겨울, 늦은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오신 할머니도 낯익은 분이었다. 형광등을 하나 계산하시고는 우물쭈물하며 카운터 앞을 서성이는 할머니가 그날따라 어딘지 불편해 보였다. 찾으시는 다른 물건이 있는지 물어도 ...
4년이 지난 지금도 미대입시 실기고사 날만 떠올리면 아찔해진다. 고사장이 있는 대구에 시험 전날 내려가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막 나서려던 참이었다. 사물함에 넣어둔 화구가방이 보이지 않아 탈의실, 매점, 수면실 등 찜질방을 샅샅이 뒤졌지만 끝내 어디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입학시험을 치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
30여 년 동안 부모님 슬하에서 편한 삶을 누리다가 아내와 엄마로 정신없이 지내온 지 16년째에 접어들었다. 먼 타국에 계신 것도 아니건만 자주 찾아뵙겠다는 결심은 왜 그리 번번이 지키질 못하는지 늘 죄송한 마음뿐이다. 지난 설에도 못 내려갔던 터라 얼마 전 토요일, 엄마의 생신을 맞아 딸아이와 둘이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 친정집에 다녀왔다. 마음 같아서는 며칠 푹 쉬고 싶었...
‘보게나, 밭에서 홀로 곡식을 거두며 제 흥에 겨워 노래 부르는 저 외로운 하일랜드의 아가씨를.’ 요즘 나는 워즈워드의 시 추수하는 아가씨에 등장하는 아가씨를 꼭 닮은 여성과 매일 마주친다. 노란 유니폼을 입고 챙 넓은 꽃무늬 모자를 쓴 그녀는 바로 우리 아파트 단지에 오는 야쿠르트 판매원이다. 항상 독서 삼매경에 빠져 있는 그녀는 힘든 농사일을 하면서도 노래로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는 하일랜드의 아가씨처럼 행복해 보인다. 아주머니를 멀리서 처음 봤을 때는 그녀의 특별한 취미를 알아채지 못했다. 음료를 사려고 ...
이사 온 지 20년이 훨씬 넘으니 집안 곳곳에 버릴 물건들이 많이 쌓였다. 방 크기에 맞게 들어앉은 가구들, 사이사이 빈 공간에 곁들인 생활 소품들, 이제는 각각 독립해 나간 아이들 방에도 쓸모없는 옷가지들이 수북했다. 어느 아침, 집 안 여기저기에 켜켜이 쌓인 못 쓰는 살림살이들이 눈에 거슬려 손을 걷어 부치고 정리를 시작했다. 색 바랜 커튼, 여닫은 숫자만큼 껍질이 일어...
오늘도 망치, 펜치, 멍키스패너, 순간접착제 등을 사방에 늘어놓고 어디 한 군데씩 고장 난 낚싯대들을 분해, 조립하느라 낑낑대고 있던 남편에게 차라리 새 낚싯대를 사라고 권하자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새 건 뭐 별 거 있나? 이 초릿대랑 저 그립을 잘 이어 붙이면 신제품처럼 만들 수 있어.” 낚시를 좋아하는 남편 덕에 바닷가로 이사 와 산 지 3년. 자칭 ‘생활 낚시꾼’ ...
세상 사람 모두가 남에게 무엇을 바라기에 앞서 조그마한 것이라도 먼저 배려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은 30여 년 동안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자연스레 갖게 된 바람이다. 공부를 잘하고 형편이 여유로워서 마음이 넉넉한 학생들보다는 공부에 흥미가 없는 학생이나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 꿈과 목표를 심어주려고 노력했던 교사 시절이었다. 그런 바람으로 시...
필라테스 학원을 차린 지 올해로 2년째에 접어든다. 지금이야 수강생이 제법 많지만 개원 초기에는 파리만 날려 걱정하던 시절이 있었다. 할머니와 처음 만난 날도 손님이 없어 한숨만 내쉬던 때였다. 왼쪽 다리가 불편해 보이셔서 잘 가르칠 자신이 없었던 데다 수강료를 5만 원이나 깎아달라고 하시는 통에 마음속으로는 할머니가 그냥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다리가 부...
대형마트 주차장에서 쇼핑카트를 정리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때였다. 옮기던 쇼핑카트가 고객이 주차해놓은 자동차에 부딪친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리는 젊은 부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니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그 무렵 어머니가 위암 진단을 받고 다니던 김치공장을 그만두셔서 우리 두 가족의 생계가 내 손에 달려 있었다. 카트를 옮길 때면 자동차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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