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나 고대하던 콘서트였는지 모른다. 학창 시절, 내 우상이었던 H.O.T의 콘서트! ‘어떤 복장으로 갈까? 현수막도 가져갈까?’ 바쁜 업무 중에도 콘서트 갈 생각에 웃음이 새어나왔다. 메마른 일상에 단비처럼 찾아온 활력소였다. 궁리 끝에 중학교 교복을 꺼내 입고 간 공연장은 내 또래들로 인산인해였다. 교복을 입어서 그런지 소녀 시절로 돌아간 듯 설레는 마음으로 입장을 기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오늘부터 돌봐드릴 이현숙이라고 합니다.” 2년 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후 첫 돌봄 서비스를 하러 간 할머니 댁. 인사를 드리고 옷가지를 빨아 봄볕에 널고 점심을 차려드릴 때까지도 할머니는 도통 말이 없으셨다. 할머니와 잘 지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됐지만 마음을 여실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실 터라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처음 만난 후 계...
베란다에 쌓인 재활용품을 정리하다가 술병 라벨에 찍힌 공병 값을 확인하게 됐다. 어떤 것은 100원짜리도 있고, 어떤 건 몇 백 원이 넘는 것도 있었다. 한 데 모았다가 마트로 가져가면 액수가 꽤 될 텐데 그냥 버리긴 아까웠다. 초등학교 6학년인 둘째 아들을 불러 “조하야, 마트에 들고 가면 빈 병에 찍힌 금액대로 환불받을 수 있으니 앞으로 네 용돈이라도 할래?” 하고 제안...
올해 80대 중반으로 접어드시는 장모님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여섯 남매 모두를 대학교육까지 시킨 분이다. 젊은 시절 학생운동에 투신했던 막내처남의 뒷바라지까지 맡아 온갖 고생을 다 하신 장모님은 그만큼 매사에 자기관리가 철저하고 점잖은 인품으로 주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몇 해 전 장인어른이 타계하시면서 혼자되신 장모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젠가부터 대문 밖 출입을 ...
아파트 창문을 열면 사계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야트막한 산이 매일 아침 나를 반긴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봉대미산은 바라보기만 해도 아름답고, 생각이 많아질 때면 머리를 식히기에도 좋은 장소다. 처음부터 산에 자주 간 것은 아니다. 3년 전이었다. 아버지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으시고 6개월 만에 돌아가셨다. 갑자기 아버지를 잃은 내 마음은 갈 곳...
대구에 사는 친구가 몇 년 만에 서울에 올라와 얼굴을 보게 되었다. 부부동반 모임에서 알게 된 남편 친구의 부인으로 마음이 잘 맞아 금세 친구가 된 사이다. 그녀가 지방으로 이사를 가 자주 만날 수 없게 되면서 전화와 문자 메시지로 안부를 나눠온 터라 반가움이 컸다. 소중한 친구와 오랜만에 만나 회포를 풀고 시장 구경도 나섰다. 그때 눈에 들어온 빨간 구두. ‘경제가 어려울...
창원에 살고 있는 언니 집에 놀러 간 날, 네 살배기 조카 지민이가 내게 물었다. “이모, 우리 집에서 캥거루가 사는 나라까지 갔다 오려면 잠수함으로 몇 시간 걸려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녀석의 호기심을 저버릴 수 없어 턱을 괴고 곰곰이 생각하는 시늉까지 한 뒤 나름 성의 있는 대답을 해주었다. “글쎄, 한 10시간 정도 걸리지 않을까?”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
올여름은 우리나라가 기상 관측을 시작한 1907년 이후 사상 최악의 무더위였다고 한다. 연일 열대야가 계속되자 아내와 나는 거실에 있는 에어컨 앞에 잠자리를 잡았다. 전기세 걱정에 에어컨 사용을 꺼리시던 구순이 넘은 어머니도 못 이기는 척 거실에 이불을 깔으셨다. 곧이어 딸아이도 자기 방이 너무 덥다며 베개를 들고 나왔다. 111년 만의 더위에 모처럼 삼대가 한곳에 모여 자...
연묵 씨와의 인연은 서울 중랑구에 살던 1970년대 어느 봄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목수로 집을 지어 파는 일을 하던 남편에게 볼일이 있어 건축 현장에 가니 앳된 모습의 한 학생이 펜치와 드라이버를 허리에 차고 어른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고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취직한 야간 공업고등학교 학생이라고 했다. 어린 나이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기특해 보였던 걸까....
2년 전 딱 이맘때의 일이다. 새벽 6시, 배를 찌르는 듯한 통증에 미혼모 시설 원장님의 차를 타고 산부인과로 향했다. 양수가 터졌고 출산이 50퍼센트 이상 진행되었다는 말에 급히 분만실로 들어갔다. 한 시간 넘게 극심한 진통을 겪은 끝에 귀여운 딸을 낳았다.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를 들으니 지난 시간들이 스치듯 떠올랐다. 공장 생산직으로 일하던 어느 날 남자 친구의 아이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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