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저씨는 누구세요?” 지난가을, 추석 명절을 앞두고 외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구순을 넘긴 외할머니는 알츠하이머로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손주조차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런 할머니 앞에서 가슴이 먹먹했다. 공무원이던 아버지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겨울방학 때 귀갓길 교통사고로 황망히 돌아가셨다. 졸지에 가장이 된 어머니는 이 일 저 일 닥치는 대로 하며 돈을 ...
쉰이 다 된 늦은 나이에 ‘방과 후 강사’라는 새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사무직으로만 일해 오다 평소 좋아하던 글쓰기 능력을 살려 새로운 도전을 감행한 것이다. 열심히 공부해서 관련 자격증을 취득한 나는 올해부터 초등학생 아이들에게 논술을 가르치고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어 감사하지만 천방지축 초등학생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다. 특히나 ‘역사 논술’...
우리 집에는 구수한 둥굴레가 떨어질 새가 없다. 따로 귀띔을 하지 않아도 다 먹어갈 쯤이면 때맞춰 둥굴레를 보내주는 고마운 분이 계시기 때문이다. 평소 몸이 약해 잔병을 달고 살던 나는 자연스레 건강에 좋은 약초와 야생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던 중 알음알음 소개로 약초에 해박하다던 그분을 알게 되었다. “시중에서 파는 건 죄다 중국산이에요. 국내산은 향이 더 구수하...
아내와 장을 보러 시장에 갈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풍겨오는 건어물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은빛으로 반짝이는 멸치가 수북하게 쌓인 광경이 내 시선을 빼앗기 때문이다. 앞서 걸어간 아내가 여러 번 나를 불러도 눈치 채지 못하고 한참이나 입맛을 다시며 서 있을 정도다. 어려서부터 나는 멸치를 좋아했다. 작은 멸치는 어머니가 물엿에 꽈리고추와 함께 달달 볶아 도시락 반찬으로...
올해 대학생이 돼 자취를 시작한 아들이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왔을 때였다. 품 안의 자식이라 했던가. 오랜만에 온 아들은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운전 연수를 받고 영어 시험을 준비하고, 그동안 못 만났던 동네 친구들과의 약속이 매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날도 귀가가 늦어지는 아들을 기다리다 잠이 들었는데 다음 날 아침 아들이 검정 비닐봉지 하나를 불쑥 내...
지난여름, 여느 때처럼 학교 수업을 마친 후 녹아내릴 것만 같은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마침 퇴근 시간이라 지하철 안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기상 관측 이래 최악의 폭염에 하나같이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 있던 나 역시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천근만근 축 늘어진 몸을 겨우 가누고 있었다. 그때 옆구리에 무언가 닿는 느낌이 들었다....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일하며 전시 해설을 하다 보면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때론 그 관람객들이 명작들보다 더 큰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지난주에는 연세 지긋한 노부부가 미술관을 찾으셨다. 다정하게 전시를 둘러보시는 모습이 무척 보기 좋았다. 그분들의 발걸음이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작품을 설명하는데 점점 뒤처지기 시작한 할머니가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그 연세에 한 시간...
그날은 유난히 버거운 날이었다. 첫째를 유치원에 보낸 뒤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잠시 쉬려는 찰나, 막둥이 둘째 녀석이 내게 ‘응가 폭탄’을 퍼부었다. 화장실로 달려가 아이를 씻겨 나온 지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젖 달라고 악을 쓰며 우는 아이를 얼른 품에 안고 젖을 물렸다. 그런데 잠시 뒤 배가 뜨끈해지더니 축축한 물기가 전해졌다. 녀석이 오줌을 싼 것이었다. 엎친 데 덮...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 우연히 스팸전화를 걸러주는 어플을 실행했다. 어플에는 전화 통화를 한 사람과의 친밀도를 나타내주는 기능도 있었다. 자주 연락한 번호가 순서대로 뜨고 그 번호를 누르면 친밀도가 백분율로 계산돼 나왔는데 1순위는 딸아이였다. 학교는 끝났는지, 학원은 잘 도착했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통화를 하다 보니 당연한 결과였다. 문득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통화 내역 ...
직업 군인인 나는 군대 선배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당시 아내는 중국어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었다. 결혼하고, 배부른 몸으로도 학업을 이어 간 아내는 3학기째 되던 해 건강한 아들을 출산했다. 아이는 우리 부부에게 큰 기쁨이었지만 아내의 공부에는 큰 차질이 생겼다. 공부를 끝마치고 싶어 하는 아내의 마음을 읽은 난 아이는 내가 봐줄 테니 걱정 말고 논문에 매진하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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