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자그마한 휴경지를 얻어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전업 농부도 아니고 일과 가사를 병행해야 하는 직장인으로 무리일 것 같기도 했지만 쉬엄쉬엄 욕심 부리지 않는다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그러나 막상 농사를 시작해 보니 모든 게 서툴렀다. 제대로 된 농기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설픈 농부 흉내를 낼 뿐이었다. 비료에, 농기구에 장만해야 할 것들도 꽤 되었다. 초보 ...
옛 물건을 쉬이 버리지 못하는 탓에 우리 집에는 삐삐, 워크맨 등 추억 속 물건들이 많다. 장롱 안에서 잠자던 핑크색 파일도 그중 하나. 어느 날 초등학교 5학년 딸아이가 장롱을 뒤지다 문제의 핑크색 파일을 발견하고 말았다. “엄마, 이게 뭐예요?”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파일 안을 살펴본 아이가 키득키득 웃으며 말했다. “엄마랑 아빠 연애 기록이네.” 파일에는 남편과 ...
매주 금요일이면 나는 수업을 끝내기 무섭게 서둘러 학교 문을 나선다. 어느 반 담임보다 빠르게 종례를 마치고 곧장 수원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날도 아침에 짐 가방을 들고 출근했기에 집에 다시 들르지 않고 바로 고향 경북 영주로 가는 막차에 오를 수 있었다. 다음 날, 고향에 있는 종합병원 정신건강과에 입원한 아버지에게 드리려 보신탕을 산 다음 병원으로 들어...
2016년 가을, 태산 같던 남편이 지병으로 쓰러져 누웠다. 대학병원의 중환자실에서 잠만 자던 남편은 겨울로 접어든 어느 날, 고단한 육체를 벗고 훨훨 떠났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제게도 생전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셨습니다.” 조문 온 사람들은 내 손을 잡으며 진심으로 남편의 죽음을 비통해했다. 그런데 장례 절차가 끝나갈 무렵, 사무실에 비용을 정산하러 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상대에게 집중해야 할 뿐만 아니라 공감하는 태도를 유지해야 하며, 필요하면 해결책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신의학과 의사로서 하루 종일 진료실에 앉아 별의별 사연을 듣다 보면 내 에너지 탱크가 고갈될 때가 많다. 몇 년 전 있었던 일이다. 나에게 치료를 받고 호전된 한 환자의 어머니가 진료실을 방문해 “아들을 잘...
딸을 유학 보낸 지 6개월이 지나 북경에 간 나는 스트레스로 단시간에 살이 찐 아이의 모습에 적잖이 놀랐다. “시장에 가면 중국 사람인 줄 알아서 편해” 하며 해죽해죽 웃는 웃음 뒤에 가려진 아픔을 작업실에 가서야 알았다. 딸아이의 그림에서 멈칫거림과 두려운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언제부턴가 아이는 전화 통화를 하다가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트리거나 하소연을 털어놓곤 했다....
초등학교 6학년 소풍 때였다. 그날도 나는 알록달록한 로봇이 그려진 파란색 나들이용 가방에 도시락을 담았다. 그 가방을 메면 어딘가로 놀러간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그날은 웬일인지 친구들 가방에 비해 내 것이 촌스럽고 유치해 보였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유치원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가방을 아직까지 들고 다닌다는 게 부끄러웠다. 며칠 뒤 하굣길에 친구가 말했다....
대학 입학 후 영어 통역 동아리에 들어간 나는 매일 저녁 스터디 모임을 가지며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영어를 배우는 시간이 행복했다. 무엇보다 동아리가 좋았던 이유는 마음 맞는 동기와 선배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후배 관계가 돈독하기로 유명했던 우리 동아리에는 졸업한 선배들이 자주 찾아왔다. 영어 웅변대회나 체육대회 등 행사가 있으면 바쁜 시간을 쪼개 함께해주었고,...
“현호야, 밥 먹었어? 돈 많이 벌어서 갈 테니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학교도 잘 다녀와.” “와, 와! 오!세!요!” 현호를 못 본 지 8일째. 집에 못 간 지도 8일이 되었나 보다. 현호는 그새 발음이 꽤 또박또박해진 것 같다.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나는 전남 순천 집을 떠나 경남 통영에서 근무 중이다. 몸은 집에서 120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 있지만 현호가 밥은 잘 먹었...
젊은 시절, 광주에서 신학교를 다니면서 계림동 헌책방 골목을 자주 드나들었다. 서점에서 찾아보기 힘든 곰삭은 고서, 손때 묻은 잡지들 사이에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특히 잡지를 좋아했다. 시간이 켜켜이 쌓여 먼지와 함께 새로운 주인을 기다리는 잡지야말로 수많은 사람 냄새를 품고 있는 오랜 친구 같았다. 하지만 헌책보다 더 좋은 것은 헌책방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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