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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본인의 이름보다 유명인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한 김민지 아나운서.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나’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아나운서
김민지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갖는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딸이자 아내, 엄마로 불리고 사회에서는 직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삶을 꾸려간다. 하지만 가족을 보듬기 위해 한쪽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SBS 〈풋볼 매거진 골!〉 〈생방송 투데이〉 〈모닝와이드〉 등의 프로그램에서 조리 있는 말솜씨와 재치 있는 진행으로 사랑받은 김민지(40) 아나운서 또한 마이크를 내려놓고 가정을 돌보는 용기있는 결단을 내린 장본인이다.
아나운서가 아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박지성 선수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지내던 그녀가 결혼 후 11년 만에 자신의 얘기를 전해왔다. 이번에는 방송이 아닌 책을 통해서다. 최근 에세이집 《반짝이지 않아도 잘 지냅니다》를 출간한 그녀. 소위 유명인의 아내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 했기에 그동안 자유롭게 생각을 밝히는 일을 꺼려온 그녀가 오롯이 ‘김민지’라는 이름으로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무엇일까.
“제 핸드폰에는 천여 개 가까운 메모가 있어요. 틈틈이 정리해놓은 일기나 단상 들이에요. 너무 솔직한 이야기들이라서 혹시 해킹이라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한 게 이 생각들을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으면서도 누군가와 공유하고 싶더라고요. 일부는 짧은 글로 정리해 개인 SNS에 올리기도 했지만 어쩐지 아쉬웠죠. 더 많은 사람들과 내 생각들을 진솔하게 나누고 싶던 차에 어릴 적부터 친숙했던 책이라는 매체가 떠올랐어요.”

큰맘 먹고 도전을 감행했지만 책을 집필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큰 책임감을 필요로 하는 작업이었다. 삭제나 수정이 자유로운 온라인상의 글과 달리 책은 한 번 세상에 나오면 변경할 수 없는 활자이다 보니 부담감이 엄습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는 가족들 덕분에 힘을 낼 수 있었다. 평소에도 아내가 써준 카드와 편지를 좋아하는 남편은 첫 번째 독자로 호평을 건네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항상 엄마 곁에서 잠들던 아이들도 어서 가서 글을 쓰고 오라며 기다려주곤 했다. 특히 엄마를 닮아 학교에서 책벌레로 통하는 첫째 아이는 엄마가 책을 쓴다고 하니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 대한 확신이 생기지 않았다. ‘책이란 건 나처럼 보통의 사람이 아니라 누가 봐도 훌륭한 업적을 이룬 사람이 써야 하는 게 아닐까?’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독보적인 이력를 지닌 저명인사도 아니고 대중에게 큰 영향력을 끼치는 연예인도 아니다. 아나운서로서의 경력마저 끊어진 지 오래된 지금은 그저 두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주부일 뿐이었다.
선수 생활 은퇴 후 축구행정가의 길을 걷기로 한 남편의 공부를 위해 결혼 후 현재까지 영국 런던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녀의 하루는 아침에 일어나 냉장고에 뭐가 있는지 살피는 것부터 시작된다. 가족의 건강을 위해 균형 잡힌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먹을 간식과 준비물을 챙겨 차로 등교시킨다. 아이들을 내려주고 장을 보고 돌아와 밀린 집안일을 하다보면 금세 하교할 때가 다가온다. 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저녁을 먹이고, 씻기면 어느새 잠자리에 들 시간이다. 영국이나 한국이나 엄마의 일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
육아는 누구에게나 힘들지만 낯선 외국에서 생활하는 그녀에게는 더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외지인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어려워 마음 한편이 헛헛했고,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루틴이 산꼭대기를 향해 끊임없이 바위를 굴려야 하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느껴졌다. 어쩌다 혼자 지하철을 타기라도 하면 ‘갑자기 지하철이 멈춰 여기 열 시간 정도만 갇혔다 나가면 소원이 없겠다’고 되뇌기도 했고 양치를 하다가 세면대를 들여다보며 수챗구멍에 몸을 욱여넣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기도 했다. 병원을 찾아 정확한 진단을 받진 않았지만 일종의 번아웃 증상인 듯했다.
다행히 그즈음 지인과 떠난 짧은 여행이 그녀에겐 치료제가 되었다. 여행이란 돌아오기 위해 떠나는 것이라고 했던가.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다듬고 돌이켜보니 어디서 무얼 하며 살든 어려움에 직면했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구나 지치는 때가 오지만 자신의 역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도. 여행을 마치고 와서는 신기하게도 더 이상 수챗구멍을 넋 놓고 쳐다보지 않았고 습관처럼 내뱉던 한숨도 줄어들었다. 전에는 하교 시간에 맞춰 아이들을 데리러 가면서 “아,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했는데!” 하며 한숨짓곤 했지만 이제는 “아침 먹은 거 치우고, 장보고, 청소도 했네” 하며 스스로를 칭찬해준다.
“회사를 관두지 않고 계속 다녔더라도 맡은 일을 열심히 하면서 별 탈 없이 생활하고 있었을 거예요. 그런데 그 모습이 지금의 저만큼 마음에 들진 않았을 것 같아요. 과거의 저는 좁은 세상에서 단편적으로 사는 사람이었어요. 아나운서도 갖고 싶은 직업이었지 꿈은 아니었거든요. 회사를 떠나 아내, 엄마 등 새로운 역할에 충실했기에 한 사람으로서 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지금의 제가 가장 나은 버전의 ‘김민지’가 아닐까 싶어요.”

갖가지 시행착오를 거치며 주어진 환경과 역할을 수긍하게 된 그녀는 대단치 않더라도 하루하루 성실히 사는 행복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나’를 잃지 않는 방법도 터득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스스로 멋있게 느끼는지 깨달았다. 타인을 배려할 때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녀는 운전할 때 기분 좋게 양보를 하고, 도움이 필요한 곳을 찾아 소액이라도 기부를 한다. 그러면 좀 더 나은 내가 된 것 같아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아이들 앞에서도 더 많이 웃게 된다.
세상엔 빛나는 성취보다 그녀처럼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해내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렇기에 보통 사람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 아닐까. 눈에 띄지 않아도, 중심에 서지 않아도 지금 그 자리에서 우리는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오늘도 별다를 것 없이 평범한 일상을 보낸 그녀가 펜을 든 이유다.
언젠가 그녀는 아이들에게 들판에 피고 지는 꽃에 대해 얘기해준 적이 있다. 따지고 보면 꽃이 피기엔 어느 계절도 좋은 날은 없다. 봄에는 벌과 나비의 선택을 받기 위해 수많은 꽃과 경쟁을 벌여야 하고, 여름은 햇볕이 강하고, 가을은 너무 짧기만 하고, 겨울은 혹독한 추위에 맞서야 한다. 어느 하나 완벽한 때는 없지만 그들은 환경을 탓하지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충분히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그녀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어쩌면 하루하루 열심히 살고 있는 평범한 이들에게 해주는 말이기도 하다.
“그냥 그대로 꽃인 거야. 있는 그대로 아름다운 거야.”
글 김윤미 기자 | 사진제공 김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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