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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나는 새해를 맞이하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거창한 한 해 계획을 세우지도, 원대한 소망을 품지도 않았다. 새해라고 달라질 게 뭐 있나. 부풀면 날아오를 줄 알았지. 부풀다 쪼그라든 게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더 이상 낙담하고 싶지 않았다. 기대도 실망도 없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주름진 마음을 나는 그렇게 한동안 내버려뒀었다.
‘처음’이라는 무구한 감각 때문이었을까. 나는 오래도록 첫출발에, 첫사랑에, 첫 만남에 무턱대고 기대하며 오롯이 마음을 쏟아냈다. 그 마음 영원할 줄 알고. 그러나 나의 첫 마음은 맥없이 녹아버렸다. 웃자란 가지에 성글게 내려앉는 첫눈 보고 달뜬 순정이 다음 날만 되어도 진창이 되어버리는 것처럼.
첫 마음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나를 발견하고 가슴 언저리 어디선가 뻐근한 통증이 새어 나올 때마다 한동안 앓았다. 첫 마음을 독하게 지켜냈다 해도 기쁨은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무지개에 불과했고, 나는 다시 찰나의 무지개를 찾아 헤맸다. 그사이 무성하게 돋아난 서운함과 실망, 자책, 원망 같은 감정들로 싸우듯 한 해를 보내고 나면 넝쿨처럼 자라난 깊은 허무에 나는 오래도록 붙들려 있었다. 그렇게 나는 텅 비어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첫 마음이 거대할수록 미래에 더 큰 슬픔을 품게 되는 것 아니겠냐고. 그러니 첫 마음의 크기를 줄여보면 어떻겠냐고. 그렇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겠느냐고.
나만의 ‘첫 마음’ 만들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슬픔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는 처음과 마지막 사이의 거리를 궁리했다. 그리 멀리 두지 않은 곳에 둘 첫 마음은, 손 뻗으면 붙잡을 수 있는 첫 마음은 어디까지로 삼아야 할까. 1년일까? 아니, 그건 너무 길다. 그럼 6개월? 사람 마음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 알지 않나. 그렇게 3개월로, 다시 한 달로 좁혀가던 거리를 하루 단위로 삼자는 쪽으로 결정 내렸다. 두 번 다시 나를 찾아오지 않을 시간, 언제나 처음이자 마지막일 나의 오늘을 매일 새롭게 만들고 후회 없이 잘 떠나보내기로 결심했다.
일단 반갑게 인사부터 해보기로 했다. 안녕, 반가워. 우리 처음 만나네, 하고. 그러곤 지극히 사소해서 평소에 쉽게 지나친 것들을 찾아보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날의 특유한 공기 냄새나 금가루처럼 부서져 내리는 햇빛같이 빛과 공기를 통해 내게 당도하는 감각들 말이다. 나만 아는 작은 세계를 나에게 선물처럼 안겨주자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오늘의 감각에 몰두해보자고 다짐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마음이 부풀어 오르는 것이었다. 민들레 꽃씨가 바람에 너울거리듯 한없이 가벼운 마음이 들었다. 하루에 대한 이 약소한 기대는 나를 아프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건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일일 것만 같았다. 이윽고 나는 주저 없이 사계절의 소망을 써 내려갔다.
올봄에 나는 연둣빛 노긋한 새순을 손등으로 조심스레 쓸어볼 것이다. 봄바람에 꽃보라가 일렁이면 고개 들어 꽃나무를 올려다보고, 벚꽃이 새하얗게 밝힌 봄밤의 공기를 가로질러보고 싶다. 꽃물 번지듯 웃는 너를 꼭 껴안으면서.
여름이 오면 어린 연초록빛 잎들이 사락사락 바람 타는 소리를 들어야겠다. 제주도 사려니숲길을 거닐며 축축한 여름 찬기를 가슴 깊이 들이마셔야지. 늦은 오후 여름볕이 방바닥에 그려낸 빛줄기도 느긋하게 바라볼 것이다. 푸른 제주 바다의 잔물결이 가자는 대로 온몸을 맡겨보고 싶다.
가을이 되면 희미하게 느껴지는 이른 아침 상크름한 바람을 반가워할 것이다. 열어둔 창문 틈 사이로 들어오는 풀벌레 소리를 듣다가 까무룩 잠들고도 싶다. 원두 봉지를 열자마자 망울 터지듯 쏟아지는 커피 향이 너무 좋다고 호들갑도 떨어보고, 하루에도 몇 차례씩 가을볕을 덧칠하는 낙엽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겨울이 되면 가장 먼저 두툼한 진회색 모직 코트에 하얀 목도리를 둘둘 감고 나가고 싶다. 베어 물자마자 피어오르는 뜨거운 김에 찬 공기 섞어가며 붕어빵 조각을 입안 가득 이리저리 굴리고 싶다. 시린 몸을 데울 훗훗한 온기를 기대하며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도 가도 끝없는 길,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고 마음 매만지고 도닥이면서.
작은 소망이 종이를 가득 채우는 동안 어느새 깊은 밤이 되었다. 오늘과 작별 인사를 나눠야 할 시간이 왔다. 시작과 끝의 무한한 반복 속에서 오늘을 기억하겠다는 증표처럼 나직이 인사한다.
안녕, 잘 가. 다시 만나자.
신효원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아이들에게 전하는 어린이언어연구소 소장입니다. 아이들의 지적 성장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믿으며 어린이 신문 읽기의 지평을 연 《똑똑한 초등신문》을 비롯하여 순우리말에 담긴 의미를 풀어낸 《우리가 사랑한 단어들》까지 남녀노소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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