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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타는 스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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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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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케이트를 생각하면 간질간질한 이야기 몇 가지가 떠오른다. 첫째로는 헤르만 헤세의 수필에서 읽은 것. 그는 짝사랑하는 여자애의 손을 잡고 꽁꽁 언 호수 위에서 단둘이 스케이트를 탔던 어린 날을 눈부시게 회고한다. 추위의 낭만적인 쓸모를 상기하고 싶을 때 꼭 찾아 읽는 글이다. 

 

영화 〈세렌디피티〉에서도 스케이트는 낭만의 정점을 뒷받침하는 장치로 활약한다. 우연히 만나 한눈에 반했던 남녀는 긴 세월이 지나 다시 스케이트장에서 재회한다. 서있기도 아슬아슬한 빙판에서는 누구에게 기대고 싶은지가 더욱 확실해지는 법이다. 빙판은 마음을 못 가누고 있는 연인들이 서로를 향해 미끄러질 기회를 준다. 넘어진 연인은 사랑스럽고 사랑 안에서의 실수는 웃음 나는 일이다.

 

조니 미첼의 노래 〈River〉는 유일한 예외다. 이 곡의 화자는 방금 막 이별한 여인이고, 그녀는 여운을 곱씹기 위해 홀로 스케이트를 탈 수 있길 갈망한다. 심지어 이 노래는 크리스마스에 하는 이별 노래다. 그러니까 조니는 연인들의 닭살스러운 전형을 뒤집는 것도 모자라 로맨틱한 휴일마저 이별을 막지 못한 날로 만들어버린다. 들떠있는 세상 때문에 내 고독이 청승맞아지는 때가 있다면 이 노래를 들으면 된다. 시리도록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내서 때아닌 외로움을 매혹적으로 만들어주니까.

 

머릿속에 가상의 뮤직비디오를 그려본다. 복잡한 얼굴로 침묵을 가로지르는 여자. 날카로운 칼날이 얼음을 스치는 소리에 그녀의 욕망이 잘려 나간다. 찬 바람이 얼굴에 닿고 관절이 시큰시큰해진다. 그것은 수많은 순간과 계속해서 이별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인 동시에 더 깊은 자신과 재회한 모습이다. 

 

나는 세월을 겪은 여자가 혼자 있는 모습을 좋아하고 닮고 싶어 한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란히 손을 잡고 깔깔대는 연인들보다 혼자 생각에 잠겨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달리는 여자가 더 ‘있어’ 보였다. 사랑 말고 사연이 있어 보였다. 외로움이 있어 보였다. 나를 어딘가로 데려다줄 것만 같은 근사한 외로움이었다. 

 

살면서 목격한 동경의 대상은 모두 혼자였고 그러므로 말이 없었다. 고등학생 때 나는 단골 피자집에서 김연아의 쇼트트랙 경기를 보았다. 그녀가 얼음 위에서 춤추는 동안 모든 손님의 피자가 식어갔다. 누군가의 독무대는 시켜둔 음식을 까먹을 만큼 집중하게 만들었다. 자신을 압박하는 빙판을 보란 듯이 휘어잡은 모습, 넘어지자마자 다시 일어나면서 올라가는 입꼬리, 소음과 상념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진 여성에게서 사람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멀리 떨어진 동네에 있는 작은 피자집의 시간까지 장악해버린 것은 빙판 위의 고독이었다. 그것은 그녀 귀에 박힌 다이아몬드 귀걸이처럼 쨍하고 차갑게 빛났다. 

 

스케이트를 직접 타보면 그녀의 대단함을 더욱 실감한다. 제대로 서있기도 어려운데 춤이라니, 기적에 가깝다. 나는 속도를 내기는커녕 모양 빠지게 휘청거리다 결국 난간을 붙잡고 끙끙대는 꼴이다. 심지어 나는 연인과 함께였을지언정 혼자였다. 있어 보이는 그녀들처럼 혼자서 우뚝 서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실은 자존심 때문이다. 

 

“먼저 가! 난 시간이 더 필요해.” 

 

알겠다며 저 멀리 작아져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따뜻한 내 방으로 돌아가 글이나 쓰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돌아와 책상 앞에 앉았을 땐 글쓰기가 빙판을 달리는 일과 다름없다는 것을 알았다.

 

쓰는 일은 혼자 타는 스케이트 같다. 나만의 방식과 속도를 터득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것을 터득하기까지 자신만 아는 곤혹을 수천 번 치러야만 한다. 넘어지는 일은 그 어떤 곳에서보다 잦다. 코끝은 썰렁하고, 내 뜻대로 되는 게 없어 고장이 날 지경이다. 방심할 수 있는 순간은 없고 얼어붙은 몸은 처량하다. 쓰면서도 나는 난간을 놓지 못한다. 붙잡을 수 있는 난간의 종류는 다양하다. 편협한 나를 숨기고 싶은 마음. 기대고 싶은 충동. 넘어지지 않는, 홀로 서지 않는, 출발하지 않는 글쓰기는 결국 외면당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놓지 못한다.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한 이의 글은 주변만 뺑뺑 돈다. 그렇게 나는 또 글쓰기 말고는 다 재밌거나 쉬울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글쓰기가 어려운 1월엔 다시 조니 미첼의 노래로 돌아간다. 그의 전설적인 앨범 《Blue》를 반복 재생하면서 내가 확인하려 애쓰는 것은 분투의 흔적이다. 두려움을 먼저 떠나보내고 혼자 남아 삶을 통과하고 있는 여자들의 무시무시한 외로움. 이 앨범은 취약함을 고스란히 내보이는 것 없이는 예술도 없다고 경고한다.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속내를 드러내야 예술이 된다. 한 줄의 거짓조차 타협하지 않는 이 예술가는 내게 힌트를 준다. 춤을 추려면 계속 넘어져야 한다고. 그렇게 완성된 네 춤을 출 수 있는 무대는 네 깊은 내면뿐이라고. 

 

 

♬ 유튜브 링크 - 조니 미첼 〈River〉 

 

유지혜(수필가) @jejebab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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