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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별,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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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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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의 감감함에 익숙해질 무렵, 새해가 온다. 새해 첫날이 겨울의 복판인 까닭은 무엇일까. 봄이 올 무렵이었으면 어땠을까. 초여름 어느 날이었다면. 단풍 물드는 가을이나 겨울의 시작점이었으면 이상했을까. 

 

까마득히 먼 옛날, 세상의 첫 새해 첫날을 상상해본다. 그날의 의미는 아무도 몰랐으리라. 그러니 기쁨도 회한도 다짐도 없었으리라. 그러니 특별하지도 않았겠지. 여느 하루와 다름없었을 어떤 날 아침에 새해라는 옷을 입혀준 이는 누구였을까. 아무튼 그때부터 새해는 특별해진 것이다. 어제와 다름없이 해가 뜨고 지고 밤이 올지라도, 어제와 다른 해가 뜨고 지고 밤이 찾아오게 된 것이다.

 

새해를 앞둔, 그저 감감한 겨울밤 나는 아직 오지 않은 새해 첫날을 상상해 보려고 한다. 늦잠을 자면 눈썹이 하얘진다는 정월 초하루는 음력일 테니까 늘어지게 자도 괜찮을 것이다. 혹시 눈이 와 쌓여있다면 그것도 좋겠다. 새해맞이 눈이야말로 진짜 첫눈일 터다. 집 앞에 눈사람을 만들어놓고 들어와 떡국을 끓여야지. 올해는 만두도 넣어야겠다. 배부르게 먹은 다음 책을 읽는 것도 좋겠다. 설거지는 잠시 미뤄둬야지. 그다음 외출을 할 것이다. 극장에 가거나 문 연 카페를 찾아가야지. 거기서 저녁이 될 때까지 머물러야지. 이윽고 밤이 오면, 바야흐로 새해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새해 첫 일기를 써야겠다.

 

해맞이를 가는 것도 좋겠다. 재작년엔 아내와 함께 집에서 가까운 산에 올랐다. 깜깜한 산길의 얼어붙은 비탈을 오르며 고생했었다. 스마트폰 플래시 불빛에 의지해 앞선 사람의 발소리를 유념하며 한 발 한 발 나아가 간신히 닿았던 산 중턱 어디쯤이었다. 주위가 환해졌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지난 눈의 흔적에 눈이 부셔왔다. 낙담했다. 이미 해가 떴구나. 

 

아쉬운 걸음을 돌리던 찰나, 모여있던 사람들 입에서 흘러나온 외마디 감탄을 기억한다. 돌아봤을 때 갓 태어난 해의 형언하기 어려운 붉은빛도. 우리는 한 그루 나무처럼 우뚝한 채 첫날의 기운을 받아들였다. 다시 가볼까? 아내는 손사래를 치겠지만 한 번 더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버지는 새해가 되면 창문을 활짝 열었다. 나는 청소기를 돌리고 동생은 걸레질을 했다. 평소보다 더 열심히. 책장에는 해묵은 먼지들이 살았다. 침대 밑에서 잃어버렸던 학용품을 발견했다. 어린 막내는 이리저리 참견하며 까르르 웃었다. 베란다 창문 너머로 이불을 터는 위험한 일은 아버지 몫이었다. 

 

약속이라도 돼있었던 것처럼 착착 일을 해치워내면 점심시간이 되었다. 새해 점심은 언제나 멸치국수였다. 어머니의 국수라면 두 그릇이 기본이지. 설거지까지 마치고 아버지의 차를 타고 목욕탕에 갔다. 아버지와 나는 남탕에, 두 동생과 어머니는 여탕으로 들어갔다. 부끄럽지만, 아버지와 내가 진정으로 한 팀이었던 적은 목욕탕에서뿐이었다. 

 

몸무게를 재고 샤워를 하고 온탕에 들어가고 사우나와 냉탕을 오가는 일련의 과정을 일사불란하게 마친 우리는 다정하게 서로의 등을 밀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아버지의 등은 작아졌고 내 힘은 세졌다. 묵묵히 서로의 존재를 확인했던, 돌이켜보면 참 다정한 보살핌 속에서 나는 살아왔던 거였다. 머리를 말리고 새 속옷을 입고 문을 밀고 나선 나는 새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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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은 한 해의 마지막 밤이다. 이윽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짐을 모두 내려놓고 옷을 단단히 챙겨 입는다. 되도록 편한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선다. 거리는 조용하다. 이 고요는 참 깊고 아늑해서 나를 설레게 만들지. 거리는 한적하다. 저마다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종각 앞에, 교회나 성당에, 혹은 거실에, 열부터 하나까지 거꾸로 숫자를 세고 나면 울리는 종 앞에 지난해의 일들은 그만 잊고 새 도화지처럼 깨끗한 한 해를 기쁨으로 맞이하기 위해 모여있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비워놓은 자리를 걷는다. 이것이 나만의 제야 의식이다. 

 

텅 빈 버스 정류장에 앉아본다. 운전기사가 전부인 버스가 잠시 멈췄다 떠난다. 불 꺼진 가게의 쇼윈도를 구경한다. 상점 안 모든 물건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있다. 어느 골목의 가로등 아래 서보기도 한다. 깜깜한 밤에 그림자는 더 진하다. 달을 구경한다. 곧 새해의 달빛이 되겠지. 세찬 바람에 몸을 떨기도 하면서 그러나 나는 걷기를 멈추지 않는다. 돌이킬 수 없는 시간이 또 이렇게 지나가고 만다는 사실로부터 느끼는 슬픔과 아쉬움 속을 헤매는 것이다. 마치 붙잡을 수 있다는 듯이. 

 

길 위에서 나는 한 해의 사건들과 사람들을 생각한다. 어떤 생각은 오래 머물고 어떤 생각은 금방 사라진다. 미안함, 고마움, 안타까움, 자랑스러움 같은 온갖 감정이 생각의 뒤를 따른다. 온전히 텅 비게 될 때까지, 그렇다 여겨질 때까지. 지칠 무렵 걸음을 돌린다. 다시 집으로 간다. 자정이 되기 전에. 

 

어쩌면 제야의 깜깜함이 있기에 새해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석별의 아쉬움을 모두 이 밤에 두고 가라고. 작별이 있어야 만남이 가능하다. 묵은 시절과 헤어져야 새로운 시기를 시작할 수 있다. 마지막은 언제나 섭섭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은 가능성임을, 새출발을 위한 자리에 내어줌이라는 것을, 마른 가지여야 새잎을 틔울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끝은 결코 끝이 아니다. 무한한 새해가 있고 새 사람과 새 의지가 있는 한 그러하다. 이 같은 믿음은 신년맞이 목욕을 마친 아이의 상기된 볼처럼 싱그럽다. 새해가 온다. 시간은 자신의 약속을 거스르지 않는다.

 

 

글 · 사진 유희경(시인) @morteble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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