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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은 우리가 만드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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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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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처음을 만들고 

처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첫눈, 첫걸음, 첫길, 첫사랑, 첫술, 첫여름, 첫인상, 첫출발. 순정하게 지키고 싶은 어떤 시작에 우리는 늘 ‘첫’이라는 관형사를 붙인다. 

 

맨 처음 피아노 위에 손가락을 얹을 때 내 머릿속엔 맑은 물이 튀는 게 보였다. 맨 처음 보조 바퀴 없이 자전거를 탔을 때 뒤편에선 아버지가 손을 흔들고, 나는 새가 보는 풍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맨 처음 강의실에 들어갔을 때 소설책을 들고 앉은 동기를 보았다. 맨 처음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았을 때 나는 가문비나무가 하늘까지 닿는 걸 보았다. 이 모든 시간을 우리는 귀히 여겨서 ‘첫’이라는 말을 붙이고 멀찍이서 본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지. 첫머리에 예쁜 문장을 써야지. 첫겨울은 당신과 함께해야지. 그렇게 처음들을 마음에 잘 간직해둘 때 우리는 좀 더 우아한 존재가 된다.

 

‘첫’과 비슷한 말로는 ‘햇’이라는 접두사가 있다. 햇곡, 햇사과, 햇감자, 햇나물. 왠지 이런 음식을 가만히 씹고 있으면 입 속에 빛이 번지는 기분이 든다. 볕의 맛이라고 할까. 시작의 맛이라고 해볼까. 처음 태어난 것들에는 빛이 있다. 떡집에서 갓 지은 가래떡이 줄줄 나올 때, 그 반들거리는 표면에 희망이 비칠 때,나는 처음 사랑을 이해했던 것 같다. 할머니 손을 잡고 참 오래 걸었다. 그런 당신을 내 안에 꼭 붙잡고 있다. 

 

맨 처음 나를 목욕탕에 데려간 건 할머니였다. 매끈매끈한 피부로 집에 돌아왔을 때, 수박을 반으로 함께 가르고 수박에 꿀을 뿌리는 것도 당신께 배웠지. 재봉틀을 사용하는 방법도, 소고깃국을 끓이는 법도, 손톱 깎는 방법도, 한국 전쟁에 관한 이야기도, 모두 처음으로 당신한테 들은 것이다. 생각해보면 당신과 같이 살았을 뿐인데 나는 ‘처음’에 관해 무한히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누구에게나 처음은 존재하고, 처음은 귀하다. 가장 귀한 것이 누구에게나 발생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처음이 지닌 강력한 힘이다. 지금 이 글이 실린 《샘터》는 1970년 4월에 태어났다. 어떤 마음으로 이 잡지는 시작된 걸까. 어떤 의지가 50여 년을 맺어온 걸까. 그 긴 세월 동안 이곳을 지났을 숱한 사람들, 손끝들, 필체들, 아름다운 문체들. 그 이야기들을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샘터라는 이름도 아득해진다. 

 

처음 샘터에서 원고 청탁이 왔을 때 내가 떠올린 것은 어느 여름날이었다. 대구의 아주 낡은 버스 터미널이었는데 누가 그걸 손에 쥐여주었다. 

 

“이게 뭐예요?”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린 책이란다.” 

 

그게 내가 처음 읽은 샘터였다. 그때 읽은 글의 내용과 표지가 어렴풋하지만 ‘샘터’라는 말을 보고 ‘옹달샘’과 ‘토끼’ 를 떠올리고 혼자서 웃었던 것은 분명히 기억한다. 

 

그 후로 수십 년이 흘러 이렇게 글을 쓴다. 시작에 대하여, 처음에 대하여. 나의 ‘처음’이 샘터에 기록될 수 있다니! 이곳에 글을 투고하고 실었던 독자분들도 이런 마음으로 샘터를 마주했겠지. 그중에는 처음으로 어딘가에 글을 싣게 된 사람도 분명히 존재했겠지. 자신의 이야기가 난생처음 글의 형태가 되어 비둘기처럼 날아가는 경험이라니. 책은 그렇게 삶과 시간을 일으켜 세운다. 오늘은 이 지면이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1월을 맞이하여 ‘새잡이’라는 말을 들여다본다.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 을 새잡이라고 한다. 기타를 배우는 순간 나는 새잡이가 될 수 있고, 빵 굽는 법을 찾다가 새잡이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우리의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의지만 있다면 언제든 처음을 만들고 처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새잡이라는 말의 두 번째 의미는 더욱 감동적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새잡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다시 새로 시작하는 일’을 뜻한다.

 

내게는 시와 글이 매일매일의 새잡이다. 늘 설원(雪原) 같은 백지를 마주하고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생각한다. 누군가의 시집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리면 심장부터 뛴다. 이제 새잡이를 시작하겠네. 원로 시인의 시집도 늘 새잡이다. 모든 책은 읽는 순간 새잡이다. 어떤 세상과 마음이 다시 새로 시작된다. 읽었던 책조차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서점은 새로운 것으로 가득하고, 새로운 미래로 웅성거린다. 

 

제빵사인 동생은 며칠 전 이렇게 말했다. 

 

“형아, 빵 만드는 게 정말 정말 쉽지 않더라. 매일 날씨에 따라 부푸는 정도도 다르고 빵 맛도 완전히 천차만별이야.” 

 

부푸는 일도 다시 시작하는 일이구나. 포옹도 상대를 새로 감싸는 일이구나. 어제 부르는 노래와 오늘 부르는 노래는 다르다. 우리는 매 순간 처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씨앗보다 충만한 가능성이다.

 

가끔 마음이 캄캄해질 때, 어떤 일이 끝나버렸다고 느껴질 때, 그럴 때 나는 휴대폰으로 강아지 영상을 본다. 지금 막 태어난 저 강아지 코끝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놀라운 햇살과 바람의 신비, 부드러운 카펫과 맑은 물소리. 이 모든 걸 경탄 속에서 보고 있겠지. 얼마 전엔 태어나서 처음 눈을 밟는 강아지 영상을 보았다. 깜빡깜빡 알전구 켜지듯 강아지는 놀라더니 이내 쌓인 눈에 코를 박고 킁킁대다가 입을 활짝 벌리고 눈 위를 달렸다. 

 

사랑한다는 건 처음을 발굴하는 일. 모든 일이 끝났다 해도 다시 새잡이하는 일. 새해에는 단단히 마음을 먹는다.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더 선량해지고 싶어요. 많이 부족한 거 알지만 그 마음 하나로 새해에는 새해를 살아가겠어요. 

 

 

고명재(시인) @snowypoe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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