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 시절, 나는 일주일에 최소 대여섯 번이던 수학 시간마다 교과서 안쪽에 근대 소설책을 쓱 끼워 읽는 이과생이었다. 아침저녁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억지로 자율 학습을 할 때마다 ‘지금 이 나라에 진정한 학문이란 존재하는가’라는 다소 심오한 회의감에 빠지곤 했다. 그 시절, 유일한 낙이자 취미 생활은 사전 읽기였다. 특유의 맨들맨들하고 가벼운 질감과 사각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이제는 본인의 이름보다 유명인의 아내, 두 아이의 엄마라는 호칭이 익숙한 김민지 아나운서. 그런 그녀가 오랜만에 ‘나’의 이름으로 이야기를 꺼낸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아나운서 김민지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역할을 갖는다.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딸이자 아내, 엄마로 불리고 사회에서는 직업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며 삶을 꾸려간다. 하지만 가족을 보듬기 위해 한쪽을 포기...
“언제 오냐. 수박 사서 기다리고 있어.사랑의 수위(水位)는 언제나 아슬아슬하고나는 거기 비친 윤슬들을 보며 자랐다.” 여름은 넘치는 계절이다. 새소리도 넘치고, 식물도 넘치고, 빛도 그늘도 땀도 꿈도 한껏 넘친다. 그러니 한껏 과장해도 괜찮다. 여름은 부사를 마음껏 쓰기 좋은 때. “너무너무 덥다!” “그치? 장난 아니지?” “나갔다가 3분 만에 흠뻑 젖었어.” 마주한 ...
나는 오래전부터 해외 봉사활동을 꿈꿨다. 외국에 나가 봉사활동을 하겠다는 결심은 직장생활을 하게 된 직후부터 생겼다. 1990년, 농촌 개발과 농업인 교육을 지원하는 농업기술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했을 때 나는 특별한 물건을 발견했다. 당시 사용하던 환등기, 스크린 등의 교육 기자재에 ‘이 물품은 유니세프로부터 지원받은 물품입니다’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걸 보면서 우...
도서관에서 옛 친구를 보았다.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옆모습을 내가 잊을 리 없다. 아마도 그녀일 것이다. 초여름 바람을 맞으며 도서관에 들어갔다. 책을 검색하는 PC쪽으로 걸어가다 발걸음을 멈췄다. 청바지에 연한 감색 리넨 셔츠를 입은 단발의 여성이 가벼운 백팩을 메고 모니터를 바라보는 중이다. 순간 현기증이 일었다. 20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그 시절 마로니에...
송혜정(28) 독서 앱 ‘북북’ 개발자 매년 취약계층 아동의 교육 격차를 줄이기 위한 다양한 사회적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여전히 열악하다. 태블릿PC나 스마트폰을 활용한 교육이 일상화된 환경에서 저소득층 아이들은 기기를 마련하기 어렵거나 대다수가 저가의 보급형 모델을 갖고 있어 수업에 필요한 앱을 사용하기에 한계가 있다. 많은 앱이 최...
요즘 잘 듣지 않는 노래는 한때 가장 사랑했던 노래일 수 있다. 한 시절이 끝나면 당시 즐겨듣던 노래도 함께 끝난다. 8년 전 R이 런던에 살 때 나는 종종 그녀를 보러 갔다. 주로 겨울이었고, 그녀가 퇴근하고 돌아온 밤이면 창문에 기대어 노래를 들으며 우리에게 다가올 미래를 막막해하곤 했다. 그때 듣던 노래 중 90년대 록밴드 ‘블러(Blur)’의 팝송도 있었다. 오직 블...
고백하건대, 나는 빵 맛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대체 무슨 맛으로 먹지. 그나마 속에 소시지나 팥소가 들어있거나 잼이라도 곁들인다면 모를까. 네가 맛난 빵을 먹어본 적 없어서 그래. 가까운 이들은 내게 진짜 빵 맛을 보여주고 싶어 안달했다. 더러 내 손을 붙들고 유명 빵집으로 이끌기도 했다. 고마운 일이지만 그들이 골라주는 온갖 종류의 빵 중에서 그럭저럭 입맛에 맞는 빵조차 ...
우린 현실성이 없거나 실현 가망이 부족한 일을끊임없이 떠올리며 살아간다.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무언가를 공상하거나 그것에 닿고자 결심할 때마음에서 솟구치는 설렘의 기운으로 현실을 버티고미래로 전진하기 위함이다.이기주 《보편의 단어》- 계절이 바뀌고 해가 지고해가 뜨고 아침마다 집에빛과 바람이 든다는 사실에언제까지나 놀라고 싶다.새 마음으로, 새 마음으로.이슬아 《새 마...
12년 전 《나는 죽을 때까지 재미있게 살고 싶다》를 출간하자 많은 곳에서 강연 요청이 쏟아졌다. 정신과 전문의가 환자를 돌보며 깨달은 인생 진리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준 덕분이었다. 수많은 청중과 인생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참으로 뜻깊었는데 그중에서도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지방에 있는 한 교육기관에서 강연하던 날이었다. 현장에 도착해 건물 주변을 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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