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커피를 좋아한다. 한때 원두부터 시작해서 그라인더, 드리퍼, 에스프레소 머신까지 커피와 관련된 도구를 사 모으는 일이 내 유일한 취미였다. 원두를 곱게 갈아 에스프레소로 추출해 마시기도 하고, 굵게 갈아 드립 커피로 내려 마시기도 했다. 특히 한 방울씩 정성껏 내린 더치커피를 음미할 때면 입안에 퍼지는 향이 마음속까지 기분 좋게 맴돌았다. 하지만 2년 전, 결혼하고부터...
그림 · 손승배 어김없이 여름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는 봄이 너무 짧아져서 체감상 겨울이 끝나고 바로 여름이 시작되는 기분이다. 더군다나 태양은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뜨거워지는 것 같다. 기세등등한 더위를 맞이하면 몸이 쉽게 지치기도 하지만 예쁜 여름옷을 입는 게 무색해져서 더 울적하다. 디자인은 포기하고 그저 시원한 옷만 찾는 일상이 즐거울 리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나는...
눈에 보이지 않아서 쉽게 와닿지 않는 삶의 가치는 때때로 주위의 작고 사소한 것을 통해 전해진다. 가령, 믿음은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 사이로 피어오른다. 미국에 와 우리 집 전속 미용사로 생된 가위질을 하며 나는 믿음의 진가에 성큼 다가서게 되었다. 사람의 인상을 좌우하는 헤어스타일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지만 여기선 사정이 조금 달랐다. 우선, 미국 미용사들이 자신들보...
그림 · 모조핀 6월의 페어링 배금도가 + 병어구이 수제 찹쌀막걸리 ‘배금도가’는 경북 김천에서 자란 무농약 농산물로 만들어집니다. 3대째 이어진 전통 양조 방식에는 무려 1,000일이란 시간이 담깁니다. 기다림과 정성이 잘 숙성된 막걸리인 만큼 맛이 깊죠. 햇빛 좋은 백두대간에서 만들어진 막걸리라 그런지 계절감을 느끼며 마시기에 제격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안주라도 이 ...
국가가 허락한 최강의 식물성 쾌락 물질, 술! 이 시리즈의 상반기 대미를 장식할 주인공으로 이보다 적합한 아이템이 또 있을까. 그나저나 벌써 올해도 절반이나 지나갔다니 세월 참 빠르다. 세월, 참, 빠르다. 이 말을 평생 한 번도 안 해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이 말을 죽을 때까지 몇 번이나 되풀이하게 될까. 시간의 속도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맘에 쏙 드는 날이 일생에 ...
어느 동화의 한 구절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높은 나무 꼭대기 끝에는 나무를 지키는 요정이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말이다.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가 사는 숲. 나무를 태우면 자작자작 소리가 난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하얀 나무가 살고 있는 곳이다. 믿고 싶었다. 그렇게 하늘과 닿아있는 나무에 살고 있는 숲 요정들을 간절히 만나고 싶었다. 낯선 사람들과의 당일 여행이 참으로 ...
지휘자 백윤학 지휘자라고 하면 근엄한 눈빛, 절도 있는 동작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하지만 백윤학 지휘자는 정반대다. 음악에 심취한 표정으로 팔과 다리를 자유자재로 움직이며 흡사 춤을 추는 것 같은 그의 모습은 그래서 더욱 특별하다오케스트라 공연장 중에는 독특한 객석이 마련된 곳이 있다. 무대 뒤편의 합창석이다. 원래 객석이 아니라 합창단이 서서 노래하는 자리이기 때문...
“방콕을 또 간다고?” “응.” “넌 맨날 방콕만 가니? 차라리 그 돈으로 다른 나라를 가.” 어머니께서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셨다. 해마다 갔던 곳을 또 간다고 하는 아들이 이상하게 보이셨던 모양이다. 사치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다. 아무리 돈을 아껴 쓴다 해도 항공료에 숙박료를 더하면 돈 백만 원은 우습게 깨지는 것이 해외여행 아니던가. 어머니의 책망을 뒤...
2010년 수단 주혈흡충 퇴치 사업. 한 사람에겐 다양한 정체성이 있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기도 하고, 소중한 아이들의 아빠이기도 하고,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도 의무를 다하며 살아간다. 여기에 한 가지 정체성을 더 가지고 있다. 바로 ‘지구인’이라는 사실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긴밀히 교류하게 되면서 지구촌이라는 말을 흔히 쓰지만 모두 지구인이라 할 ...
이제는 세상에 안 계신 화가 김점선 선생과 길게 얘기 나눈 적이 있다. 신문사에서 미술 기사를 쓰던 시절이었다. 단행본 에세이를 내셨다는 소식을 듣고, 막후의 사연이 궁금해 전갈을 넣었다. 선생은 전시를 앞둔 서울 인사동의 화랑에서 만나자 하셨다. 적당히 따스한 날들이 이어지던 아름다운 계절로 기억한다. 20년 전쯤의 일이다. 대화가 길어져 어쩌다 선생의 젊은 시절 이야기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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